[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주의!@
신학의 외줄을 덩실덩실 타는 외줄 타기의 달인!
그가 [신의 변명] 이후로 다시 한번 진리 찾기에 나섰다.
예전 [부족한 기독교]시리즈가 한국교회라는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면,
이번 책은 아예 놀이터를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이제 옥성호씨는 한국의 바트 어만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바트 어만의 주장처럼 우리 한국교회도 역사학적으로 성경을 접근한다면 오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신앙고백과 역사를 혼동해선 안 된다.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부활은 기독교의 보루 같은 존재다.
바울이 그렇게 열변을 토하며 일생 복음 전도자의 길을 갔던 것도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병이 들고 죽음에 이르러도 희망을 놓지 않고 사는 것은 부활 믿음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부활이 진리가 아니라면..?
본격적인 후기에 앞서, 우선 이 말부터 하고 싶다.
난 옥성호 씨의 책이 너무 좋다. 독자로서 너무 좋다는 얘기다.
무엇보다도 각주가 너무 재미있고 유익하다.
사실 옥성호씨의 책을 읽으며 본문 내용으로 배우는 것도 많지만 각주에서 배우는 정보도 상당히 많다. 유명한 신학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업적이 있는지 이렇게 상세하게 가르쳐주는 책은 솔직히 별로 없다.
그리고 글이 정말 맛있다.
고급 어휘와 끝날 줄 모르는 긴 문장으로 무장한 책이 아니라, 정말 읽을 맛나는 글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만화책보다 더 재미있다!)
이런 맛깔나는 글을 통해 기독교의 진실을 본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 책에 동의하는 점들...
1.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는 게 그렇게 잘못인가?
옥성호 씨를 비판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런 주장을 한다.
“옥성호의 책은 소설이다. 왜냐하면 팩트를 근거로 얘기하지 않고, 항상 “~이러지 않았을까?”라며 자신의 생각을 마치 사실인 양 매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추측일 뿐이고 오로지 저자의 상식이 기준이 되어 전개가 된다. 그 주장은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비록 그의 추측으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지만, 그것이 만약 ‘타당한 주장이라면’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2. 왜 쟤네 들은 한 마디도 안 하지?
특히, “다양한 사람들에게 출현함”이라는 챕터는 상당히 설득력 있었다. (p128-)
저자는 이 챕터만큼은 신약성경이 가진 결점을 정확하게 짚고 있다 p139
부활을 증명해주는 바리새인들, 로마황제 등등 비기독교 인들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크레이그의 변론은 자기 변론조차 필요 없게 만드는 자기모순에 빠져있다.
“부활은 선포일뿐 증명하러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는 그의 변론은 기독교 변증론도 필요 없게 만드는 내부의 적인 셈이다.
부활이 선포만 한다고 하면, 굳이 기독교 변증론이 왜 필요한가?
3. 이제는 솔직해지자.
사복음서에 나타난 불일치를 지엽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으로도 아주 위험하다.(P182)
설교를 할 때도 어느 특정 단어를 묵상하고서 나누지 않는가! 은혜받으면 써도 되고, 서로 모순되는 내용이 있거나 사람 수가 다르면 “지엽적인 사안”인가?
게다가, 그런 “지엽적인 사안”을 쿨하게(?) 인정해버리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개혁주의에겐말이다개혁주의에겐 말이다. 축자 영감설,성경무오설 모두 부정하는 꼴이 된다.
이는 개혁주의에겐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반대하는 점들...
하지만 개인적으로 옥성호 씨 주장에 반대하는 부분도 있다.
(사실 구구절절 옳다고 얘기하는 것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큰 틀에서는 동의하는 바이나 몇 가지 주장에 대해서는 재고해 볼 만하다.)
1. P37 부활 신경이 만들어진 것이 오히려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억지로 믿게 하려고 그랬다고?
위 주장에 대해서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
저자의 주장대로 일종의 “세뇌”를 위해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만들어서 주입시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신경을 억지로 만들었다면 분명 반대 목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2000년 전이라지만 신경까지 만드는 정도였다면 분명 대부분의 초대교회 성도들도 동의하는 바 내용이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법제화’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법을 만든다는 것은 대다수가 인정하는 가치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이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법 제정은 절대다수의 동의에서, 공감에서 출발한다.
마찬가지로 신경이 만들어진 것은 대다수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보인다.
니케아 신경과 다른 환경일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고 내 의견일 뿐이다.
2. P39 그리고 야고보가 1인자이고 게바가 2인자라면 왜 로마서 1장 부활 신경에서 게바라는 이름이 제일 처음 나왔을까?
[야고보를 찾아서] 책에서부터 이번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까지 저자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 야고보의 위치이다. 하지만 고전 15에 나오는 부활 신경을 보면 게바가 처음 나온다. 따라서 이 신경은 저자가 주장하는 “야고보가 1인자”라는 주장과 비교해 볼 때 석연치 않은 점이다. 왜 야고보가 아닌 게바가 먼저 등장했을까?
3. 또 한 명의 "크레이그"의 반박은 어떻게 설명하실래요?
예전에 읽었던 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에서도 '빈 무덤'논쟁이 있었다.
이 책은 바트 어만의 책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를 반박하기 위해 5명의 신학자들이 똘똘 뭉쳐 쓴 반박서이다. 5명 중 한 사람인 '크레이그 A. 에반스'라는 신학자는 예수 매장에 관해 집중적으로 반박을 했는데, 그의 반론은 아주 역사적이었으며 논리적이다. 그는 '예수 매장'이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논증한 바 있다. (해당 책 4장 : 시신 매장 전통과 증거 바로 알기(P.121~) 참조) 고고학적인 증거자료까지 제시하며, 당시 로마 정부가 유대인의 관습을 존중했다고 설명하는데 내가 봤을 땐 상당히 논리적이었고 설득력이 있는 글이었다. 필로, 요세푸스, 신약 성경, 초기 랍비 문헌, 급기야 <로마법대전>까지 자료를 제시하며 바트 어만의 주장(예수의 매장이 있을 수 없다)을 단번에 반박했다.
또한 그의 반박 가운데는 '십자가 죄수 사면'이라는 역사적 내용도 기술했는데, 이는 옥성호 작가의 "바라바 허구설"을 정면으로 반박한 내용이기도 하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옥성호 작가의 말이 맞긴 하다. 하지만 당시 로마와 유대 이스라엘과의 복잡 미묘한 관계를 생각해 볼 때 바라바가 있었을 수도 있었겠구나 납득이 되기도 한다.
과연 옥성호 작가는 이런 크레이그 A. 에반스의 반박을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4. 그대의 선물은 포장이 의미 없어요...
책 겉표지 뒤를 보면 “성숙한 종교로 나아가도록 추동한다”라는 글귀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부활이 모순이고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성숙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
저자도 인정했듯이, 부활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예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성숙”이라는 말로 포장할 수 있을까?
그만큼 부활은 기독교의 뿌리 중에 뿌리요 시작점이다.
성숙이 아니라 기독교를 부정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러니 ‘성숙’이라는 말로 포장을 안 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진실을 말하는 것에는 포장이 필요 없다.
4. 아쉬운 점
앞서 비판가들의 비판을 말했던 것처럼 저자의 상식에서 펼쳐지는 상상 내용이 이 책에서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P109.110 저자 말대로 반역자의 매장 장소를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너무 쉽게 알기에는 상식적으로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증명하는 다른 팩트도 이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때문에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상황이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다른 반역자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얘기해준다면 훨씬 신빙성이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인 바람
개인적으로
테마를 열 개 잡아서 옴니버스식으로 엮는 책보다는,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진득하니 쓴 책을 앞으로 계속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어떤 저자보다도 흡입력 있고,글이 흥미롭기 때문에 옥성호 씨의 문체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공부를 하고 싶다.
-----일부 내용들
P60 “주류 신학에 부합하는 내용만을 팩트라고 부르는 건, 다시 말하지만 ‘신앙고백’이지 ‘학문’이 아니다. 신학자도 명색이 ‘학자’라면 연구하고 검증하는 책임을 져야지, ‘신앙고백’을 연구 결과처럼 말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P67 "바울에게 부활은 100% 영혼의 문제였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당한 상처를 그대로 지닌 몸이 움직이는 게 부활이라면, 바울에게 그건 ‘불완전한 부활’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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