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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기 작가의 판사 소설 [합리적 의심]
도진기 작가의 지난 작품, [유다의 별 1,2]를 재밌게 봐서 그런지 이번 작품도 꽤 기대가 컸다.
더구나 이번 작품은 자신이 평생 일해온 판사의 삶을 다루는 작품이었기에 그 기대감은 평소와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재미있다.
물론 법정소설이기 때문에, 추리의 기발함이나 스펙터클한 액션 같은 건 거의 없다.
하지만 나름 반전도 있고, 스토리의 재미까지 더해져서 여느 미스터리물 못지않은 재미를 선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재판 과정, 판사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마치 재판소에 있는 것처럼...
소설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묘사'이다. 그게 인물이 됐던, 환경이 됐던 묘사를 잘해야 독자가 이해를 잘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도진기 작가는 묘사를 잘하는 사람이다. 인물의 생김새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재판소까지. 독자가 빅픽쳐를 그릴 수 있게끔 잘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실제상황과 가장 흡사한 재판 과정일 것이다. 실제 판사직을 지낸 작가답게 확실히 사실에 입각한 재판 과정이 눈에 띈다.
P40 “변론의 갱신”이라든지 “직접주의 원칙”같은 내용들은 이제껏 살면서 처음 만나보는 것들이다. (뭐.. 기껏해야 법정소설이라고 읽은 건 존 그리샴 소설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처음 본 게 당연할지도...)
이런 팩트에 입각한 이야기가, 잘 꾸며진 묘사와 합쳐져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남을 판단하는 직업 : 판사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 : 2)
'난 역시 판사 안하길 잘했어!'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당연히 사법고시 준비부터 해야겠지. 그러나 판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되는 직업이 아니다. 머리도 똑똑해야 하지만 사람의 생사를 법적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결정에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사람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직업이야말로 얼마나 힘든 고역인가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무조건 사람 살리는 의사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으나, 법조인들, 즉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들은 매번 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것 같다.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누군가를 유죄로 선고해야 하고, 누군가를 무조건 변호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제대로 정신무장을 하지 않으면 올바른 법조인이 되기에는 힘들다.
재판 과정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되는 "합리적 의심"이라는 것.
과연 그것은 선한 용도로 쓰이고 있을까?
우리를 억울함에서 풀어주는 동아줄일까, 아니면 악인이 법망을 피해 가도록 도와주는 트릭일까.
소설을 보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다. 인간의 사악함을 보기도 하고, 억울함을 국가가 풀어주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기도 한다. 저자는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해서 썼다고 했는데,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소설 속 내용처럼 억울한 일이 실제로 있었다면, 정말 바라건대 정의가 법 이외의 방법으로라도 실현되기를 바란다.
칸트가 말하듯 '요청으로서의 신'이 정말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다.
What if...
만약에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었다면?
우선, 난 범인은 될 수 없다. 범인처럼 살리 없다. 왜냐하면 착해서가 아니라, 그만한 깜냥이 안되기 때문에..;; 범인도 속일만한 매력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깡다구가 있어야 하는데 난 그런 주변머리는 안 된다. (이걸 감사해야 하나)
그렇다면 피해자 쪽인데.... 내가 만약 피해자의 입장이라면, 과연 저 "합리적 의심"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기준일까 생각해본다. 내가 과연 "합리적 의심"이라는 법의 기준을 무사히 통과해서 내 원수에게 정의 구현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머릿속으로 상상만 해도... 이내 아찔해진다.
부디 내 생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첫 단추를 잘 꿰듯 매끄럽게"
이 책은 '작가의 첫 법정소설'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소설 치고는 약간은 자조 섞인 내러티브에 가깝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설득력 있는, 독자의 공감을 얻기에 충분한 스토리였다.
그가 왜 판사직을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었는지, 이 책을 보면서 이해가 될 만도 했다.
외부에서 봤을 때 느껴지는 판사의 근엄하고도 우직한 표정은 사실 허상에 가깝다는 걸 저자는 소설을 통해 말하고 있다.
(혹시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이렇게 썼나? 아니다.
판사직에 대한 자조가 카타르시스를 위한 장치라고 보진 않는다. 만약 그럴 거라면 더욱 비참하게 썼어야만 했다. )
P.S.: 이 책을 본 많은 독자들이 나와 같은 다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 죽을 때는 반드시 부검을 해달라고 유언으로 남겨야겠다"는 다짐말이다.
물론 모두가 호상이길 원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것 아닌가.
소설 속 피해자처럼 뜻하지 않게 부검이 필요할 때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왠지 부검을 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마치 보험처럼.
===========마음에 와닿은 글귀들
P34
민사소송도 마찬가지다. 원고의 소장을 읽어보면 피고는 천하의 잡놈이지만, 피고의 답변서를 읽어보면 원고가 교활한 사기꾼이라는 생각이 드는 때도 있다. 한쪽 말만 듣고 어설프게 덩달아 흥분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런 재판의 속성을 알다 보니 어느새 어떤 문제든 한쪽의 주장만으로 열광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차가운 습성이 몸에 배어버렸다.
P72
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을 추위 속에 살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
P111 "인연의 순열조합"
"인연의 순열조합"이라...
만약 누군가를 과거에 더 일찍 만나서 알았더라면.
만약 누군가를 미래에 더 늦게 만나서 알았다면.
재미있는 표현이다.
P131
형사재판에서 유죄로 하려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형사재판은 한 인간을 감방에 보낼까, 말까, 심지어는 교수대로 보낼까, 말까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정도 증거로는 턱도 없다. 합리적인 선에서의 ‘의심’이 전혀 없는 수준까지 입증되어야 한다. 이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증명’의 원칙이며, 형사 재판에서 유죄로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다.
P146
판사에게 요구되는 건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지혜로 내리는 획기적이고 기발한 판결이 아니다. ‘법과 절차를 빈틈없이 준수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뿐이다. 그 결정이 옳은 것까지는 보장하지 못한다. 그것에 도달하려 무리하는 순간, 그는 ‘갓 콤플렉스’에 사로잡히고, 오히려 오류에의 내리막을 내달리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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