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복숭아였던 영화
[집 이야기]
@스포일러 내용이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혼자 오만가지 생각을 다 하면서도 끝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으셔서 늘 속을 알 수 없는 우리 아버지 이야기.
1. 과거에 사로잡힌 우리 아버지
아직도 과거에 살고 계신 답답한 아버지.
과거 열쇠 따는 기술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기에 그 기술하나만 믿고 평생을 사신다.
문제는 이 기술을 찾는 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
새로운 디지털 도어락 기술을 배워야 하는데 무슨 고집 때문인지 아버지는 새 기술 배우는 걸 마다하신다.
2. 과거에 사로잡히면 모두를 잃을 수 있다.
아버지는 왜 가족 모두를 잃으셨을까?
영화를 보다 보면 아버지의 모습이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다.
무뚝뚝한 성격과 술을 달고 사는 모습이 꼭 우리네 부모님 세대를 닮았다.
옛날 찬란했던 시대 사고방식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우리 부모님 세대.
옛날 방식으로 가족을 대하고, 무조건 소리 빽빽 질러도 아내나 자식새끼들이 자신을 따를 줄 알았나 보다.
변하지 않는 성격 탓에 가족 모두를 잃은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걸 이야기해준다.
단순히 2G 폰을 써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변하는데 왜 아버지는 그걸 모르셨을까...
3. 그럼에도 이 영화가 복숭아인 이유.
사실, 영화 속 아버지 행동들을 보면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이다를 비치해놓고 봐야 할 정도로 하는 행동들이 고구마처럼 답답하고 자기 마음대로다.
가족들이 떠난 게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등을 보면서 안쓰러움을 느낀다.
말없이 복숭아 김치를 담그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도 사랑이란 것이 있구나라고 깨닫는다.
방식은 구식 일지 모르지만 그분에게도 분명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고,
표현할 줄 모르지만 그분에게도 사랑을 표현할 나름의 제스처가 있었다.
자신은 배려라고 했던 행동들이 나중에 가족들에게 상처가 될 때 분명 당신의 마음도 엄청 아팠을 것이다.
아픔을 참는 게 미덕이라 여겼던 아버지들은 이렇게 오늘도 혼자서 삭히고 또 삭힌다.
4. 딸 은서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이유
그나마 막내딸 은서는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듯이 아버지 집에 머문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녀가 가진 직업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문사에 일하는 그녀만이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신문사와 열쇠. 모두 사라지는 직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그녀는 옛 기술에 메여있는 아버지의 행동들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영화 중간에 은서는 아버지가 쓴 "열쇠 있읍니다"라는 맞춤법을 "틀리다"라고 말하지 않고, "옛날엔 그게 맞았다"라고 인정해준다. 딸은 아버지의 인생을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은서가 아버지의 인생살이를 "틀리다"라고 생각했다면 분명 그 집에 하루도 있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딸 은서는 아버지의 인생살이를 이해하고 있다.
5. 우리는 무조건 변해야 하나??
영화가 끝나고 문득 이런 질문이 생겼다.
'옛날 것은 모두 틀린 걸까?"
분명 영화에서 등장한 아버지의 삶은 비참하게 막을 내리는 듯 보인다.
창문 하나 없는 집처럼 꽉 막힌 아버지의 삶은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는 삶이다.
하지만, 궁금하다.
1980년대에 멈춘 듯한 아버지의 사고방식은 무조건 잘못됐다고 봐야 하나?
말없이 자식이 필요한 게 무얼까 고민하며 슬쩍 수건을 준비하시고 복숭아 김치를 담그시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왜 우리는 가슴 먹먹함을 느낄까.
단순히 '세대 차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어서다.
무조건 변해야 좋은 건가?
우리가 잊고 있었던 옛날의 좋았던 가치들은 무엇이 있었을까?
이렇게 변하는 게 맞는 걸까?
디지털 도어락으로 바뀌어버린 은서의 단기 임대주택은 화려한 디자인이 있지만
언제나 삭막하다.
"사람을 떠나라고 있는 방"에 사는 우리 현주소가 과연 행복한 주소가 맞는 걸까?
2020년 본 한국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영화라고 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모든 장면이 나에게는 하이라이트였고, 버릴 장면이 없었다.
난 이렇게 선인, 악인 구별 없이 사람 사는 냄새나는 영화가 좋다.
영화 덕분에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이유영 씨를 보면 미국 배우 "루니 마라"가 생각난다.
두 사람 모두 가만히 있는 모습에서도 무언가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느껴져 온다.
아버지 역을 맡은 강신일 씨도 정말 연기력에 찬사를 보낸다.
강신일 씨가 아닌 아버지 역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박제범 감독의 연출력,
배우들의 연기력이 시너지를 발한 놀라운 영화가 탄생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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