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독서감상을 쓰지 않았다.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물리적인 시간 여유도 없었다.
[픽미업]등 자기계발서류의 가벼운 책들을 읽긴 읽었지만 왠지 독서 감상까지는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묵히고 묵혀 뒀던 [무례한 기독교]를 읽었다.
저자인 리처드 마우는 풀러 신학교 총장이라고 한다. (내가 정말 존경했던 존 파이퍼가 나온 신학교가 아니던가!!)
칼빈주의 전통에 속해 있으면서도 재세례파와 오순절파에 대해 우호적이고 개방적이라는 것이 참 흥미로운 일이다.
(왜 풀러 신학교를 개혁주의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
이 책의 큰 주제는 이렇다
P.26 "다른 이들이 자신의 신념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즉 진리를 양보하지 않지만 모든 이들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투쟁보단 대화로 간극을 좁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을 존경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라'는 말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까(마5:14-16; 레 19:34; 렘 29:4-7; 마 9:36; 롬 12:18; 딛3:2; 벧전 2:17; 벧전 3:15-16)
이 책은 각 챕터마다 상당히 흥미롭다.
"시민 교양"에 대한 전체적인 정의부터 시작해, 시민 교양을 지닌 크리스천의 삶은 어떤 것인가 구체적인 주제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동성애, 낙태, 다원주의, 전쟁 등 기독교인이라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슈들을 다루면서 자기만의 정립된 가치관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은 책이다.
그가 내세운 "시민교양"은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1. 시민교양과 복음전도
P34 "시민교양은 복음전도의 책략이 아니다"
상당히 숙고할 만한 부분인 것은 인정한다. 우리가 시민교양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무조건 복음을 전도하기 위함은 아니라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우리는 때와 장소에 맞게 복음을 전할 때도 있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도 있다. 저자는 내가 사람들을 만나 선하게 대하고 교양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것이 결국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여 "복음화시키려는 전략이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 본문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삶을 전도하는 데 썼다.
복음 전도가 아닌, 사람을 교양 있게 대하는 자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된다고만 생각했다면 바울은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도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여금 저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전략’ 차원에서 말씀하셨다.
심적으로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삶은 분명 목적과 의도에 맞는 삶이며, 단순히 시민교양을 지닌 채로 사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2. 돌을 던지는 것 VS '니그로'라고 욕하는 것
P56-57 저자는 어릴 때 흑인 친구랑 싸운 이야기를 꺼낸다.
하루는 흑인 친구가 저자에게 돌을 던져 머리에 상처를 입혔다고 한다.
화가 난 저자는 그 친구에게 "니그로"라는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일이 교장 선생님 귀에 들어가고 흑인보다 오히려 저자가 더 많은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돌을 던지는 것보다 "니그로"라고 말한 것이 더 큰 잘못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네 몸에 해를 입히려 했다. 하지만 너는 그 아이의 영혼에 해를 입히려 했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니그로라고 욕한 게 왜 거짓 증언이고, 도둑질이냐;;;(흑인 친구에게 있었던 하나님이 주신 존엄성 훔치려고 했다니;;)
앞으로 욕하지 말고 때려야겠네 그럼;;;
3. 안락사 & 낙태
P63 안락사에 대한 그의 입장은 '수동적 안락사'이다.
즉, 식물인간의 의료 장비를 뺄 수 있다는 입장.
뭐 이것 자체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바로 낙태다.
그는 낙태도 찬성한다.
“낙태는 살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무슨 궤변인지;;;
이 사람이 풀러 신학교 총장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안락사와 낙태를 논하면서 “에이 그래도 ‘살인’은 아니잖아” 말장난 하나..;;
말씀 구절을 대입하던지, 아니면 신학적 입장을 내세워야지 ;;;
4. 제국주의식 복음전도는 옳을까?
저자의 논리 말고 간단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복음 전 도론자와 대화론자가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성경은 복음전도만 말하기 때문이다.
나도, 상식적으로, 대화를 해 나가면서 복음을 전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를 그렇게 경멸하면서도 복음은 제국주의식으로 해야 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성경은 복음에 대해 '토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복음을 ‘토론’ 하지 않는다. 다만 ‘선포’할 뿐이다.
따라서 성경이 무오한 완벽한 책이라고 믿는 다면 당연히 복음 전도론을 옹호해야 한다.
정답은 나와있는데 왜 우리는 불편해할까 왜냐하면 정답 자체가 상식에 어긋나 보이기 때문이다.
선포만 하고 마는 거라면 지하철 전도남이 생각나고 빨간 띠를 두르고 서울역 광장을 누비는 묻지마전도팀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이 옳을까..?
저자는 진리를 고수하되 끊임없이 비기독교인들과 교류하고 진리를 나누다 보면 결국 그들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대화라는 것은 상대방의 의견에 내가 귀를 연다는 뜻이다
만약 예수 이외의 진리가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끄덕인다면 대화는 가능하겠지만 진리는 포기한 셈이다
반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다면 믿음은 지키지만 대화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는 내용인데 저자는 계속 장밋빛 미래만 바라보고 있다
5. 세상 속에서 지도자가 될 수 있을까?
P125 마키아벨리식 지도자의 진짜 목표는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관리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적 자세를 가지고도 충분히 세상 속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All or nothing의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강압적으로 팀원들에게 복음을 강요하거나 반대로 복음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세상 속에서 지도자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든 예시 가운데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예수님의 사례다.
첫 째, 예수님이 우신 이유(요 11:35)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예수님이 우신 이유가 친구들의 슬픔에 마음이 동여하셨고, 그 슬픔이 자기의 영혼이 가득 채우도록 잠시 허용하셨다고 예측하는 것은 억측이다
둘째, 사실 직장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먹히지 않는 곳임은 물론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도 힘든 직장도 많다
여기서 예수님의 예를 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예수님은 직장을 가지지 않으셨다
직장인이라 함은 회사 방침에 따르는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이 단지 세리와 창녀들과 식사를 하셨다는 것 이상의 요구를 요하는 것이 직장인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드는 예수님의 예는 부족한 면이 많다
6. 정당한 전쟁론
—p139
저자는 정당한 전쟁론을 주장하고 있다.
왜 그가 정당한 전쟁론을 지지하는지는 설명을 그리 많이 하진 않았지만 무분별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정당한 전쟁론'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시민교양에 비추어 봤을 때 그가 생각하는 것은 전쟁은 불가피하지만 여러 방면으로 기독교적인 전쟁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평화주의자들이 내세운 논리 또한 모두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무조건 "칼빈도, 루터도 전쟁을 찬성했다"라고 해서 전쟁이 진리다라고 말해선 곤란하다.
7. 대화하기
P149
나치와 사탄 숭배자, 합법적인 근친상간을 두둔하는 자, 이단들을 온유하고 존경하는 자세로 대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 가지 의미는,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격이요 여전히 그들에게도 신의 자비가 미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들과의 대화를 중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란, 그들이 타인의 삶을 해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대화 단절을 요청하는 경우에만 한한다는 뜻이다.
8. 지옥
P157 저자는 지옥에 대해 말한다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에게 행하는 어떤 것이다.'
—수동적으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함으로써 능동적으로 지옥에 간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우선 저자는 성경에서 묘사된 지옥의 이미지가 단순히 ‘상징’이라고 치부한다
마 8:12/ 계 20:15 “쫓겨난다”는 표현 등등 성경 속 묘사는 상징일 뿐 결국 우리가 능동적으로 간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것이 '상징'이고 어떤 것이 '문자 그대로'인지 구분할 수 없다.
두 번째로 능동적으로 지옥을 선택한다는 걷는 결국 구원에 인간의 결정이 들어간다는 얘기가 된다.
칼빈이 말하는 예정에 어긋난다
우리가 지옥을 선택한다는 것은 천국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음을 말한다
9. 아브라함 카이퍼와 테레사 수녀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한다.
P166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
네덜란드에서 기독교 정당을 창립했고 20세기 초에는 네덜란드의 수상까지 역임하였다
철학자이자 신학자, 교육가이자, 다작의 저널리스트
아브라함 카이퍼는 열렬한 칼빈주의자
저자는 아브라함 카이퍼를 존경하지만 테레사 수녀의 온유함과 섬김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말하는 기독교 승리주의는 자칫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히려 테레사 수녀처럼 마 25장에 나오는 것처럼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으로 섬기는 것이 필요하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동성애자 앞에 세워놓고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
10. 느린 하나님 섬기기
P182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건전한 의식은 신념 있는 시민교양의 삶에 필수적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내심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 책을 보고 느낀 결론은 이것이다.
"저자가 말한 식으로 살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가? 100% 번아웃된다"
내가 경험해봐서 안다.
왜 요즘 시중에 ‘나’를 타인으로부터 보호하는 책이 많은지 저자는 관심이 있을까 싶다.
(심지어 기독교 분야에서도 이런 테마로 나온 책들이 많다.)
번아웃되니까 그런 거다.
만약 이 책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의 경우다.
성경대로 살아보지 않고서 '그러려니'하고 그냥 읽는 경우,
또 하나의 경우는 성경대로 살아보고서 잘 안되지만 '내 경우라서 그런 걸 거야. 내가 연약하니까 그런 거야...'라고 자책하면서 희망 고문하는 경우.
내 눈앞에 다원주의자가 으르렁거리고 있고,
만약 온유함을 위해 삶을 다한 가람이라면 결코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리라
'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튜브로 영어공부 하자!![날라리 데이브 책] (0) | 2019.07.17 |
---|---|
이 책, 고르길 잘했다! (0) | 2019.07.16 |
바트 어만! 옥상으로 따라와!!![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 (0) | 2019.03.18 |
오쿠다 히데오 작품을 이제야 보다니[공중그네] (0) | 2019.03.15 |
광신과 편향 사이[유다의 별] (0) | 2019.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