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바트 어만! 옥상으로 따라와!!![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

거니gunny 2019. 3. 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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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바트 어만에 대한 5명 반박서[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었나] / 우: 바트 어만이 쓴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5명의 신학자들이 바트 어만의 만행에 분노했다. 


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는 그렇게 탄생했다.



Who is he??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트 어만은 '이 바닥에서' 그리 유명한 인사는 아니었다. 

날고 긴다는 기라성같은 칼뱅부터 시작해서 이름있는 현대 신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의 이름은 점차 대중 가운데 인식되기 시작했고, 급기야 현대 기독교 신학자들 사이에선 경계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출처: 유튜브)


그가 유명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째, 그의 성장 스토리가 기가 막히다. 


유튜브에서 그의 토론 영상들을 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자기 소개가 있다. 


바트 어만은 자신을 가리켜 "복음주의 기독교" 안에서 자란 사람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신학교에 들어가 M.Div 까지 마친 학자이다. 우리나라였으면 아마 목사 안수까지 받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가 성경을 연구할 수록 자신이 믿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팩트들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그가 보기에 성경의 정확성이나 내용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오류가 많은 것이었다. 


크리스천들은 대게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천이 되는 간증들을 많이 접한다. 

하지만 바트 어만의 경우는 정반대였다. 

철저한 복음주의 속에서 자랐던 그가 지금은 불가지론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는 차이가 있다. 


바트 어만은 무신론자(Atheist)가 아니다. 불가지론자(Agnostic)이다. 

불가지론, 말그대로 "모른다"라는 입장이다. 

아예 신을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 보류 상태이다. 


[신의 언어]를 지었던 프랜시스 콜린스는 불가지론자였던 과거를 반성하면서 

'불가지론은 비겁한 자세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의 존재를 긍정할수도, 부정할수도 모르겠다는데...

(오히려 이 자세가 훨씬 정직한 자세 아닌가?)


그래서 바트 어만은 현재 "불가지론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둘 째, 당당하다. 


유튜브에서 "bart ehrman debate"라고 검색해보시라. 


그가 기독교 변증가들과 토론하는데, 크리스천이 99%인 관중들 앞에서 토론을 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적"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장에 "진심"이 담겨있다. 

때문에 알아듣기 쉽다. 

"오컴의 면도날"처럼 군더더기 없이 명쾌하게 자신의 논리를 주장한다. 

그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보는 사람 몫이겠지만 적어도 그가 주장하는 데 있어서는 거침이 없다. 


심지어 그는 무신론자들과도 토론배틀을 한다. 


이번에도 99%가 무신론자들인 관객들 앞에서 토론을 진행한다. 

그럼에도 그는 전혀 기죽거나 저자세를 취하지 않는다. 


이런 그의 당당함 때문에 불가지론자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불가지론자들 사이에서는 "예수"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인 권연경 교수는 바트 어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바트 어만은 신학계의 리처드 도킨스다. "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그는 이미 판을 키워나갔다. 


==========

자, 이런 바트 어만의 논리를 반박한 신학자들이 있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대사가 생각났다.


"야. 바트 어만! 니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따라와!"




우선 이 책은 저자가 여러 명이라는 것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한 권의 책이라기 보다는 5명의 논문을 모아놓은 모음집이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바트 어만의 1장을 마이클 버드가 맡고, 2장을 크레이그 에반스가 맡고, 이런 식으로 각자 전공을 살려 반박했다.

이렇게 5명의 신학 전문가가 나서서 겨우 한 명의 책을 반박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에서 바트 어만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이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 

이미 방송과 여러 매체에서 기독교를 반박하는 불가지론자로 명성이 나있던 그였기에, 

신학자 입장에서도 이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5명이 힘을 모아 "정의의 이름으로" 합체를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1. 이 책에서 반박하는 내용들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성경적이다. 
특히, 내가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라는 책을 보면서 의문을 제기했던 부분도 그들이 지적했다. 

바트 어만이 주장했던 “피라미드 식 신(神)관” 은 나도 반박하는 바이다. 


특히, 초반에 충격을 주었던 아폴로니우스 이야기도 자세히 살펴보면 충분히 반박가능한 이야기다. 

마이클은 아폴로니우스의 전기가 220-230년 에 쓰였기 때문에 오히려 아폴로니우스가 예수의 이야기를 차용했을 가능성이 짙다.

시간상으로 분명 뒤에 쓰여진 이야기는 사복음서가 아닌 티아나의 아폴로니우스 이다.


과연 바트 어만이 주장한 것처럼 예수와 인자는 다른 사람일까? 

바트 어만의 말대로 성경에서는 직접적으로 “나 예수는 인자다”라고 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인자에 대한 언급 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삭개오를 회개하게 만들고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했을 때는 바로 본인이 인자라는 걸 90%이상 까발리는 것 아닌가?! 


이렇듯, 이 책은 충분히 납득이 될 만한 반박을 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도 예외없이 반박을 논리적으로 하기 때문에 바트 어만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꼭 챙겨볼만한 책인 것 같다. 


특히, 크리스 틸링의 반박이 가장 재미있고 이해가 잘 됐다.

번역의 빡침이 곳곳에 있긴 하였으나 틸링의 코믹한 필체는 잘 살린 것 같다.

그는 성경안에서 승귀 기독론과 성육신 기독론이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결국 어만은 자기 입맛에 맞는 구절만 갖고 왔다는 비판을 한다. 상당히 타당하고 솔직한 논증이다.

가장 마음에 든다.



2. 하지만 아쉬운 점이 정말 많았던 책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좋은 내용을 썼다고는 하나 부족한 부분으로 여겨진 내용도 꽤 많았다. 

(많은 이들이 짧은 시간 안에 반박을 해야했기 때문에 내용이 부족하다고 분석한다.)


2-1. 번역을 그지같이 해놨다. 


한 문장이 어떻게 네줄이나 되나? 

또 상당히 불친절하다. 

“파토스(p148)”라는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건 도대체 무슨 용기인가? 심지어 그 단어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없다. 만약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용어에 대해 무지하지 않을까? 


내용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불편한 점이 또 하나 더 있다 

이 책에서 인용한 바트 어만의 책은 영어로 된 원서이지 한글판이 아니다. 따라서 미주를 보면서 한글판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챕터를 떠듬떠듬 추적해나가면서 한글판 페이지를 찾을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걸려 중반 이후에는 포기하고 말았다. 

뭐, 누구 탓하려는 건 아니지만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2-2. 반박한 내용에 재반박이 가능할만큼 완벽한 반박은 아니다.

P.19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예수의 선재적 아들 됨과 유대 지혜 전승의 논리적 융합에 근거한 것이지, 이교 원자료와의 상호접촉에서 파생된 것이 아니었다." 

—결국 예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발전은 이방종교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구약과 유대교 지혜 전승의 영향때문이다? 시편 2편과 119편 묵상에 자극받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주로 고백한다는 말은 옥성호 책에서 이미 반박되고 있다. 유대교 전승과 예수를 이어줄만한 적절한 구약 구절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57페이지에서 저자는 바울의 서신 가운데 여러 부분에서 예수와 천사는 구분되어서 표현되었다고 반박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바트어만이 지적했던 갈4:14 번역에 대한 반박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점이다 (바트어만의 책 p.297) 

이 구절에 대한 번역이 왜 문제가 되는지는 일언반구 없이 “다른 구절들도 많다. 봐라, 예수님은 천사가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것은 제대로 된 반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P83-86에서는 바트 어만이 세운 기준들은 얼토당토 않은 전제 위에 서 있다며 반박한다. 

(바트 어만이 말한 기준: p117-120 *1. 독립적 출처의 기준 / 2. 비유사성의 기준 / 3. 맥락 신뢰의 기준) 

— 바트 어만이 말한 기준과 이 책에서 말한 기준은 확실히 반대점 위에 서있다. 

개인적으로는 둘 모두 일리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아쉽다. 분명 바트 어만은 기준을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이 저자는 이 중에서 “비유사성의 기준”만 비판하고 있다. 비판하려면 다 비판해야지 왜 하나만 골라 말했을까? 그렇다면 나머지 두 개의 기준은 암묵적으로 인정한다는 말인가? 


빈무덤에 관해 p121~

크레이그 에반스는 빈 무덤에 관한 바트 어만의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팩트로 반박한다.

그의 이야기를 보면 확실히 로마정권에서 무조건 시신매장을 반대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리마대 요셉에 관한 반박은 아쉬운 점이 많다.

특히 아리마대 요셉이 성경에서 묘사한 것처럼 과연 존경받는 공의원이었으며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을지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을 때 모종의 반대 행동을 취했어야 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언급을 써 넣지  않았다. 여전히 아리마대 요셉의 묘사는 의문스럽다.


3. 반박하는 열심을 보면서...


지난 번 비교신학 책인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를 볼 때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되살아 났다. 


2000년 이후에 이렇게 논쟁거리가 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들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들을 여러 곳에 심어놨다.


그런데 문제는 모두가 자기 입맛에 맞는 구절만 사용한다는 점이다. 

개혁주의, 아르미니안 주의, 오순절, 불가지론자, 무신론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취향대로 성경 구절을 가져다 쓴다. 


어찌보면 바트 어만도, 이 반박하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어만의 이론을 반박하기는 하지만 이들 역시 어만의 모든 이론을 반박하지는 않는다. 물론 지면상의 이유로 다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실제로 성경에서 어만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아전인수 성경 해석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바트 어만의 정직한 반응은 많은 이들을 일깨웠다. 나는 그의 정직함에 일단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어떤 이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정직하게 나아갔고, 

다른 이는 그의 의견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했다. 


정말 궁금하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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