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다듬어지는 찬호께이 [기억나지 않음, 형사]

거니gunny 2020. 1. 15. 00:01
728x90
반응형

출처: 책[기억나지 않음, 형사]

이번에는 심리학이다.

어찌 보면 인간의 미묘한 감정을 다루는 심리학과 이성을 바탕으로 사건을 뒤쫓는 추리 소설은 환상의 짝꿍이다.
찬호께이가 그린 이번 작품을 통해서도 둘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알 수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인해 6년의 기억이 상실된 형사 쉬유이.
문득 차에서 잠이 깬 형사는 이미 종료된 사건에 강한 의문을 품으며 재수사를 홀로 시작한다.

형사가 기억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점이 재밌을까. 아마도 기억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독자처럼 사건의 진위를 다 알 수 없다는 부분일 것이다. 그가 단서를 새롭게 발견하지 않는 이상 그의 생각은 우리가 추리한 데까지 갈 수밖에 없다. 그의 부분기억만을 단서로 추리해 나가기 때문에 답답한 건 독자들도 마친가지다. 이내 흐릿했던 기억을 되찾았을 때는 어찌나 시원한지. 가슴 한편에 있던 고구마가 함께 없어지는 듯하다.

보통 추리소설은 안갯속을 걷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반전이 공개되고 답답함이 사라진다. 이 소설은 답답하다가도 각 챕터마다 반전을 선사하며 시원해지는 지점이 있기 때문에 읽는 내내 답답해할 필요가 없다. 막판엔 역시나 강력한 한 방을 선사한다.
특히, 찬호께이는 독자를 (문자 그대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멱살 잡고 끌고 가기로 유명하다. [13.67] 때 그걸 처음 느꼈다. 이번에도 역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이 책 제목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 싶다. 원제목은 [기억나지 않음, 형사]가 아니다.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가사에서 따온 [The Man who sold the world]이 이 책의 원 제목이다.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장치로 사용되는 노래 가사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에겐 생소한 제목일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 보위를 아는 한국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터, 책의 내용을 잘 담아내고, 쉽게 기억해 낼 수 있도록 [기억나지 않음, 형사]라고 지은 것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책은 그의 후기 작품인 [13.67]과[망내인]에 비해선 완성도가 조금 부족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선, 책 표지 디자인이다.
제목을 센스 있게 지은 건 좋았다. 하지만 표지 그림이 너무 공포소설 같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이 그림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표지를 볼 때면 빨간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져 나오는 것이 마치 고어물 속 한 장면처럼 섬뜩하게 다가온다. [13.67]과 [망내인] 정도가 완벽에 가까운 표지라고 생각한다.

둘째로 반전 속 아쉬움이다. 찬호께이는 떡밥을 잘 회수하는 소설가로 유명하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 팟캐스트 방송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좋은 추리소설의 기준은 성실한 떡밥 회수이다. 앞부분에서 아무리 떡밥을 잘 던져도 끝에 가서 잘 회수하지 못하면 좋은 추리소설이라 평가받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는 찬호께이는 성실하게 떡밥을 회수하는 좋은 추리소설가이다. 이번 작품 역시 떡밥들을 하나 둘 씩 빠짐없이 잘 챙겼다. 하지만 떡밥 설정이 조금은 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연치고는 너무도 많은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환자가 등장한다. 혹은 가장 절정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사건이 단순하게 풀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추리가 너무 복잡해서 아쉬웠다. 물론 이건 순전히 개인적인 소화의 차이일 수 있다. 하지만 찬호께이의 후기 작품들을 완벽하게 만족했던 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번 작품은 다소 추리를 어렵게 복잡하게 너무 꼬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아쉬운 소리를 몇 마디 했지만 찬호께이의 작품은 늘 기대된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 덕분에 하루하루가 느리게 간다.
21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트라우마”라는 말은 생소한 학문 용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우리 모두가 상처와 아픔을 많이 갖고 있는 세대기에 이제는 그런 용어들이 낯설지가 않다. 만약 나에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충격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잠시 생각해 본다.
추리소설이지만 상처와 치유라는 것을 생각하게 만든 성장소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