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책[개혁신앙, 현대에 답하다]
한숨이 나온다.
아니, 한숨을 넘어 약간의 분노가 느껴진다.
책 제목이 [개혁신앙, 현대에 답하다]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괄호를 더 넣어야 한다.
[(귀를 막은) 개혁신앙, 현대에 답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개혁주의는 절대 반성하는 법이 없다.
시작부터 단호하다.
한국교회 문제는 교회가 개혁주의를 따라가지 않아서이다.
이러니 순복음을 비롯한, 다른 교단들이 미개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정작 개혁주의를 표방한 교회 문제는 보지도 않고 말이다.
경향교회는 개혁주의를 못 따라가서 그렇게 문제가 터진 걸까?
정말 갈 때까지 가는구나 싶다.
한국교회가 짊어진 문제를 복음주의에 모두 떠넘겨버린 채,
"거봐~ 너네들 우리 방식대로 안 해서 이렇게 문제가 된 거야."라고 다그치듯이 가르친다.
P10
복음주의에 근거한 신앙의 개인화(성경+체험+전도)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앙은 신자의 삶의 현장인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로까지 이어가지 못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 곧 ‘기독교 세계관’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다. 신앙과 삶이 분리된 채 서로 연관성을 갖지 못하므로, 신앙은 교회에서나 의미가 있을 뿐 삶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중략)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복음주의 신앙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이 한 마디다.
“한국교회, 개혁신앙만이 답이다. “
한국교회가 문제가 되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및 대소요리문답을 몰라서이고, 교리와 칼빈신학을 제대로 몰라서이기 때문이다.
물론, 문제의 원인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이런 무지막지한 이기적인 방식은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칼빈만이 답이고, 다른 사람의 신앙은 인정하지 않는다.
뚝심이 대단하단 측면에선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그런 이론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교회에서 왜 사랑이 없는지, 왜 신앙에서 넘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개혁주의를 체화하지 않는 개인의 탓일까?
여전히 대소요리문답을 몰라서 그렇게 삶이 지치고 힘든 걸까?
나도 개혁주의를 어렸을 때부터 배워왔고 따라왔던 사람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개혁주의 안에서는 오로지 자기들이 답이고 진리다.
앎만 있고 전혀 제자로 살아내지 못하는 자들은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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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는 복음주의에까지 책임을 묻는 개혁주의다.
저자는 한국교회가 과거 너무 복음주의만을 강조해왔기 때문에
노방전도, 기도만을 강조해 왔다고 얘기한다.(P18)
자, 저자가 원하는 만큼 한국교회는 변했다.
노방전도 요즘 누가 하나?
예전에는 하기 싫어도 중 고등부, 청년부의 강압에 못 이겨 했지만 지금은 누가 하나?
기도하는 중고등학생 과연 있을까?
저자가 우려하는 한국교회에만 있는 새벽 기도.. 이미 죽은 지 오래다.
네덜란드에서 하도 공부를 많이 하셔서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교회는 새벽 기도도 안 하고, 전도도 안 한다.
그런데 이게 좋은 변화인가?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과연 기도하고 있는가?
개혁주의는 과연 전도하고 있는가?
기껏해야 말하는 것이 "출산장려"라니...
반쪽짜리 답안지를 얘기하면서도 어찌 그리 당당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본 책은 마치 한국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부흥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정통 개혁주의 교회”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건강하다고 볼 수 있는가?
실제로 개혁주의를 따르는 교회를 가봤고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너무도 학문적이다.
학문적인 신앙생활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조금이라도 책이나 공부에 소질이 없는 사람들은 그곳에 적응하기 쉽지 않다.
보이지 않는 교회의 높은 문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기도도 안 한다. 기도가 중요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경우 하루에 4시간 기도한다고 하는데 지금 개혁주의 교회는 과연 기도를 얼마나 하는지 모르겠다.
설교도 주로 원론적이다.
삶의 고민이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뭐, 설교야 자기만의 신념이 있으니까 그걸로 뭐라 하고 싶진 않다.
다른 교회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동일하게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은 듯 개혁주의 교회를 옹호하고 있다. 오히려 학문적인 분위기와 개인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속에서 오로지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만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어떤 메리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개혁주의 교회도 동일하게 성도들이 수평이동을 한다.
개혁주의 교회도 동일하게 성도가 줄어드는 것에 고민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도 소위 “은따”가 존재하며, 사회적 지위가 교회 내에서도 중요한 위치로 작용한다.
왜 한국교회의 문제를 마치 3자가 바라보듯 보는지 이해할 수 없다.
2. 심지어 저자는 흘리듯 이런 얘기까지 한다.
P19
기독교 초창기 시절, 한국은 좋은 선교사가 왔고,
일본은 자유주의 선교사가 많이 갔다고 한다.
뭐라고?? 우리나라엔 자유주의 선교사가 많이 안 와서 감사하다??
그럼 일본은 하나님이 버리신 건가?
3. 저자는 계속해서 지난 100년간의 복음주의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편협하고 이기적인 발언이다.
내 눈에는 그저 자기가 네덜란드 신학 배웠으니까 그게 진리라고 믿고 다른 것들은 동의하지 않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밖에 보이지 않는다.
과연 미국에서 대각성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교회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을 때,
개혁주의는 무엇을 했는가?
여전히 개혁주의는 극보수로 여겨질 만큼 지엽적이지 않은가?
만약 개혁주의가 정말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신학이라면 지금쯤 가장 주류가 되어야 하는 신학이 됐어야 하지 않는가?
(아마도 그들은 "진리를 따르는 강력한 소수"라 자기들끼리만 또 모여들 것이다.)
——
4. 개혁주의가 말하듯 교리문답 중요하다.
하지만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이 지금의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개혁주의 교회는 자연히 건강한 교회로서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5. 대형교회와 연합집회
저자는 지난 2007년에 있었던 어게인 1907 대형집회를 비판한다. (P52)
개교회 예배는 등한시하고 대형 집회를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개교회 예배는 약화되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고신 측에서도 이런 예배는 당연히 존재한다.
교단 산하 전체가 모이는 예배를 고신 측에서는 한 번도 안 드린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왜 선한 의도를 가지고 모인 연합집회를 그런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저자는 대형교회의 문제점을 마치 복음주의의 문제점으로 왜곡하고 있다.
모든 대형교회가 마치 교황인 것처럼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도 모자라 대형교회의 문제가 마치 복음주의의 문제인 것처럼 억지로 밀어붙이고 있다.
고신 측에서도 나름 대형교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 그들은 잘못된 것 아닌가??
왜 개혁주의는 대형교회가 없는 것처럼 복음주의 대형교회들만 지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6. 한국교회의 사랑 실천
P59
한국교회는 이제 단순한 종교집단을 넘어 기득권을 가진 이익집단 혹은 압력집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다만 종교적인 관심이 있다.
지금 위 지적을 개혁주의 교회가 할 수 있는가?
천만에.
만약 개혁주의 교회들이 저 기준에 부합했다면 한국에서 절대 “개독교”란 용어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주의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들의 행동에는 반성을 안 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론에만 몰두하여 교리문답과 신앙고백만 교회에서 잘 되고 있으면 만사형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단, 고신 측은 과연 공의와 사랑에 정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예전에 우연히 초교파 모임에서 북한 새터민을 돕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새터민을 졸업하는 사회 초년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이다.
개혁주의 모임에서는 전혀 생각도 못 했던 경험이었다.
개혁주의 교회 안에서 사회에 대한 참여를 본 적도 없고, 경험해 본 적도 없었기에 충격은 컸다.
(이제까지 있었던 개혁주의 내 가장 큰 경험은 성경퀴즈대회, 찬양경연대회, 수양회 뿐이었다. )
순복음만큼 자원봉사를 많이 하는 교단도 없다.
미혼모나 사회적 약자계층을 돕는 재단까지 세울 만큼 적극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준다.
개혁주의야말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관심이 있는지 묻고 싶다.
과연 다른 교단에 비해 얼마나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애초에 왜 이런 누워서 침 뱉는 지적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7. 유아세례
P71
신자의 자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근거해 (유아) 세례를 받는다.
...
유아세례는 언약의 백성임을 표하는 것이요,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도장 찍는 것이다.
애당초 세례가 가진 1차적인 의미가 무엇인가? 신앙고백 아닌가.
내가 강압에 의해 믿은 것도 아니요,
아무 생각 없이 믿은 것도 아니요,
무엇을 믿는 것인지 내용을 다 알고 있고, 그것에 동의할 뿐 아니라 믿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고백이고, 세례가 그것에 대한 의식이지 않은가.
유아세례는 말 그대로 아기가 받기 때문에 아무 의지도 없고,
지식도 없고,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 받는 의식이다.
그런데 달랑 유아세례 받은 것을 갖다가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는 근거를 들이미는 것은 억지 중 억지다.
차라리 열린 예배에 설교 말씀 듣고 결신한 것이 훨씬 상식에 맞다.
유아세례가 구약의 할례와 같다고?
말고 안 되는 논리다.
취지가 똑같으니까 인정?
성경 어디를 봐도 유아세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만약 할례와 세례가 같은 의미의 의식이라면 바울이 세례를 받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까?
신약에서도 할례와 같이 세례를 난지 8일 만에? 줘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8. 가정예배
노아가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한 것이 대관절 가족 예배와 직접적인 연관성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호수아가 얘기했던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다"라는 고백이 가정예배를 했다는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경 구절에 없는 것까지 끌어들여서 얘기하는 것은 개혁주의가 가장 싫어하는 방법론 아닌가? 이 정도면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
9. 사교육
사교육을 아주 그냥 적그리스도처럼 묘사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 다니는 크리스천 학원 강사들 다 때려치워라
10. 경쟁
신학교 교수가 되는 사람들은 경쟁 안 하고 모두 기도로 뽑았나?
11. 교육
특히 저자는 2부에서 교육과 관련한 이슈들을 많이 던졌다.
저자 자신이 기독교 학교 교목이기도 했었고,
홈스쿨링을 했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매 챕터를 볼 때마다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성이 너무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한국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신선놀음 같은 말뿐이다.
그리고 매번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는.... 그랬다. ”
네덜란드 대사인가 싶을 정도로 네덜란드 예찬이 자자하다.
그런데 그렇게 네덜란드 얘기를 하면 할수록
한국 교육의 현주소를 잘 모르는 말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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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을 바엔 차라리 신원하 교수의 책 [시대의 분별과 윤리적 선택]이나 [교회가 꼭 대답해야 할 윤리 문제들]을 보는 것을 추천한다.
신원하 교수는 솔직하게 개혁주의와 다른 신학의 주장을 나열함으로써 개혁주의에 까방권을 주지는 않았다.
이 책은 개혁주의 우물 안에서 보는 ‘그들만의 위로 리그’ 서적일 뿐이다.
적어도 책으로서의 가치를 찾지 못했다.
개혁주의가 “꽉 막힌 기독교 보수”라는 오명을 쓰기에 딱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제발 저자가 말한 개혁주의가 전부가 아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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