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 영화가 단색이었다면,
<가버나움>은 여러색이 이루어진 다색이다.
고작 2시간 남짓 되는 영화를 통해 아동 인권, 조혼, 가족의 무책임, 마약, 불법체류, 종교 등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밑으로 스포일러 내용이 많습니다. 주의@
1. 영화의 가장 큰 핵심 주제는 단연 "아이에 대한 부모의 무책임"이다.
(굳이 부모라고 할 것도 없이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무책임한 어른이 등장한다.)
오로지 자신의 성욕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이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어른들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묻고 있다.
사하르는 사랑도 하지 않는 청년에게 결혼을 하고, 끝내 그 결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극으로 끝난다.
과연 자녀를 낳기만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한 답은 없다.
냉정하게 말하면, 이 주제는 영원한 인류의 숙제 같은 거다.
자인의 마음은 100% 이해한다. 나 또한 사랑도 하지 않는 청년한테 고작 11살밖에 되지 않는 딸을 시집보내야만하는 부모가 영화 보는 내내 못마땅했다.
하지만 자인 부모의 심정을 아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는 것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을 어린 자인은 알리가 없다. 그것이 부모로서 딸에게 해주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딸이 시집가면 최소한 번듯한 침대 위에서 잘 수는 있지 않느냐는 것이 부모의 마음일 수도 있다.
물론 방법이 백번 잘못되었고, 딸 사하르의 죽음을 결정적으로 이끈 원인은 부모에게 있다. 어디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뭐래도 시작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보인다. 잘못된 사랑이 빚어낸 비극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보고 있다.
우리도 자녀가 좀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은가!?
마냥 자인의 부모에게 손가락질만 하기에는 우리의 모습이 온전치 못하다.
2. 알라도 예수도 구하지 못한 소년 자인
레바논만큼 특이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아예 이슬람이 존재하는 아랍국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100% 기독교만 믿는 나라도 아니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이슬람과 기독교를 모두 선택했고, 지금은 마치 커다란 부족 둘이 대립하는 것처럼 공존하고 있다.
그렇다. 오히려 그곳은 이슬람과 기독교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런데 자인은 이슬람과 기독교, 둘 중 어느 종교를 통해서도 위로를 받을 수 없었다.
아랍어 속에 드러나는 알라의 자비와 사랑은 현실 속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아이들이 몇 푼이라도 벌려고 지나가는 자동차를 붙잡고 상품을 파는데 마지막 인사가 "알라의 축복이 함께 하길"이라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리 없는 아이들이 불쌍하기만 했다.
과연 그 알라는 왜 이들을 이렇게 내버려두는지 야속하기만 하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다.
금쪽같은 자식 요나스를 키우기 위해 생계를 포기해야만 했던 라힐은 십자가 목걸이를 메고 있었다. 자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며 아이가 잘 때도 향을 피우며 축복을 했던 라힐은 결국 불법체류로 붙잡혀 아이를 버려야만 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엄마 라힐이 요나스를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을 때 과연 예수님의 사랑은 언제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기껏해야 구치소에서 같이 춤춰주는 것 뿐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알라도 예수도 그들을 구원할 수 없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것을 영화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 곳곳에서 보이는 십자가와 그들의 이슬람식 인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님을 다시한번 관객들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오히려 잘못된 신앙관으로 인해 자인은 급기야 부모를 고소하기까지 한다.
관객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인을 정말로 화나게 만들었던 그 한마디.
"하나님이 한 아이를 가져가시고 한 아이를 주셨단다"
마치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는 욥인 것처럼 코스프레를 하고 앉아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주시는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로다"고백하는 믿음 좋은 엄마로 보이겠지만 자인은 그런 엄마의 위선을 잘 안다.
엄마의 믿음은 추월적인 믿음이 아니라 무책임한 맹신이었던 것이다.
3. 결국 요나스를 구원한 것은 자인이었다.
요나스를 도와준 것은 어른도 아니었다. 종교도 아니었다. 부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가장 도와줄 힘이 없는 자가 요나스를 구했다. 아무 능력도 돈도 없는 소년 자인이 요나스를 도와준다.
이것을 보고 양심상 도저히 감동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이 그림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왜 자인이가 요나스를 도와주어야만 했을까.
4. 가버나움이 저주의 도시라고?
마태복음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
제대로 정신이 박힌 크리스천이라면 절대로 이들을 보면서 "쯔쯧, 저것 봐. 예수님 안 믿고 회개 안하니까 가버나움이 아직까지도 저렇게 저주받고 있지...."라고 감히 말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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