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서 봉준호 감독이 "봉테일"이라면
추리소설계에서는 찬호께이야말로 "찬호테일"이라 불릴만하다.
이미 찬호께이의 팬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찬호께이가 쓴 책이라면 무조건 읽는다.
(그리고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이제까지 하나도 겹친 장르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소재와 참신한 이야기로
독자들로 하여금 찬호께이의 나라에 빠지게 한다.
내 최애 작품이면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하기도 한 [13.67]이 최고의 작품이지만
그 이후로 읽은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 [풍선 인간], [염소가 웃는 순간] 역시 정말 대단한 작품들이다.
이번에는 유럽에서 내려오는 전래 동화를 소재로 아주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만들어 냈다.
[마술 피리]는 호프만 박사와 한스 하인이 유럽 전 지역을 순회하면서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는
중세 유럽판 [셜록 홈즈]다.
우리도 익히 잘 아는 동화들이 스토리의 소재이기 때문에 굉장히 흥미롭다.
"잭과 콩나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은 동화들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나기 때문에
더 애정을 가지고 읽게 된다.
그런데 찬호께이는 이런 동화들을 단순히 "동화"로 끝내지 않고
'마법'과 '마녀' 대신, 교묘한 속임수, 과학, 숨겨진 사연들을 넣어서
아주 합리적이고도 재미있는 추리물로 바꾸었다.
1. 떡밥 장인 찬호께이
추리 소설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떡밥이다.
하지만 찬호께이가 선사하는 떡밥은 그 레벨이 차원이 다르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온 이름이나 캐릭터들의 행동들이 나중에 가면 아주 의미 있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단서들을 토대로 아주 천재적으로 주인공 호프만 박사가 사건을 해결한다.
정말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셜록 홈즈식 추리 소설이다.
사건이 다 벌어지고 나서야 등장해 "당신이 범인이지!"라고 말하는 포와로 탐정은 너무 싫다.
(아가사 크리스티는 나랑 취향이 안 맞다.)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속에 숨겨진 사연들을 찾아내고,
찾아낸 사연들을 토대로 사건까지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추리의 휴머니즘 아니겠는가?
호프만 박사의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정말 엉뚱하지만 기대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떡밥들을 놓치고 읽어도 괜찮다. 워낙에 이야기가 흡입력이 있다 보니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도 "이거 떡밥이었어?!"하고 놀라서 앞부분을 찾으려고 하면 쉽게 찾게 된다.
앞부분을 보면서 떡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 희열은 정말 최고다.
2. 디테일의 끝판왕 찬호께이
이 책은 특이하게 후기 챕터가 있다.
찬호께이도 이 책에서 언급했지만, 저자 본인은 "후기"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굳이 후기를 남겨서 "변명"이나 "부가 설명"을 하는 것이 오히려 작품을 감사하는데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지.)
그럼에도 이번에 마지막 챕터까지 할애하여, 작가의 후기를 쓴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번 책은 동화와 창작소설의 '퓨전'이었다. 그런데 이 퓨전이 자칫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줄 수 있다 판단하여
후기로 부가설명을 한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그 작가의 배려는 나 같은 무지몽매한 독자들에게 아주 좋은 지도가 되어주고 있다.
하지만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썼기 때문에 후기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아무도 캐치하지 못할 세세한 부분까지 저자가 고심하면서 만들어냈다는 부분에서 정말 놀랍고 감동했다.
문제는 '일상'이었다. 원래는 밀릿 부인이 주인공에게 차를 대접한다고 썼는데, '찻잎'은 16세기 말까지 영국에 전해지지 않았으니 차를 마시는 문화는 그때부터 50년은 기다려야 했다. P572
저기요 찬호께이 작가 씨...
차 따라주는 걸로 아무도 뭐라 안 해요.🤣ㅋㅋㅋㅋ
아주 사소한 행동들이 있었음에도 장인정신으로 도자기를 자비 없이 깨듯 삭제시켜 버렸다.
주인공 호프만 박사가 영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식 이름이 된 이유도 아주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독일과 영국은 끊임없는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윈저 왕조가 독일 왕실 혈통인 것은 역사적인 아이러니다.
저자는 이런 흥미로운 사실을 캐치하고 재미있는 설정으로 주인공 이름을 독일식으로 지어냈다.
마지막 찬호께이의 맺음말이 참 인상 깊다.
"나는 역사서를 좋아한다. 거대한 시대 속에서 앞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고개를 돌려보면 언제나 똑같이 '거대한 시대'가 있었고 인류는 잘 헤쳐 나왔다...."P596
이번 소설의 배경이 된 16세기 중세 유럽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종교로는 구교와 신교의 싸움이 극에 달했던 시대였고,
과학으로는 "마법", "마녀" 같은 미신에서 합리적인 "과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작가는 그래서 이 시대야말로 '추리'가 빛을 발할 시기라고 봤다고 한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대. 거기에 이상한 마녀사냥이 흉흉했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가정을 이루며 그 혼돈의 시대를 잘 살아냈고, 21세기까지 번성하고 있다.
21세기도 만만치 않은 일들이 많다.
AI의 도래로 인해 시대는 황망하게 변하고 있다.
그야말로 하루 자고 일어나면 세상을 바뀌어있다.
이런 불안정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16세기에서도 인류는 잘 이겨냈고, 지금도 인류는 잘 이겨낼 것이다.
찬호께이의 소설을 보면 주인공들이 정말 좋다.
가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적을 처치하는 걸 보면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지만
심적으로는 너무 통쾌하고 100% 이해가 된다.
내 삶 속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싶다.
적어도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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