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마침내 읽었다. [도킨스의 신]

거니gunny 2023. 4. 20.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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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킨스의 신]을 마침내 읽었다. 

십수 년 동안 방에 처박아 놓았던 책이다. 
이 책을 구매했을 때만 해도 당장에 읽을 것처럼 기세등등했는데…
리처드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은 나에게 이단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도발 때문에 얼마나 거룩한 분노가 있었던지...
씩씩거릴 줄이나 알지 제대로 비판을 못했던 내가 처량하게 느껴졌었다.
그래서 리처드 도킨스 얘기만 나오면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고는 애써 무시했다. 
(또 리처드 도킨스의 책들은 왜 이리도 두꺼운지...)

알리스터 맥그래스

이런 도킨스의 도발을 아주 신사적으로 정정당당하게 받아낸 크리스천이 있다고 해서 아주 반가웠다. 
그의 이름은 알리스터 맥그래스. 
과거 교회 형의 추천으로 읽었던 [예수를 아는 지식]의 저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책이 너무 너무 재미없게 보였다. 
과학이 싫어서 문과를 왔는데, 이 책을 보려면 적어도 과학을 제대로 알아야 볼 것만 같았다. 
 
내 신앙심보다 과학혐오가 더욱 강했다. 
결국 책장 속에 십수 년을 꽂아 놓고 거룩한 부담감(?)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팟캐스트를 통해서 [이기적 유전자]를 소개받는다. 
'아참! 그러고보니 내 책장에 도킨스 까는 책이 하나 있었지 아마?'
 
호기심 반, 마음에 진 빚 청산하기 반 해서 먼지를 털어내고 책을 읽었다. 

개정판 [도킨스의 신]


1. [도킨스의 신] 장점

 
이 책이 아주 센스있다고 느꼈던 점들이 있는데 하나는 친절한 설명이다.
독자들을 위해 친절하게 다윈의 진화부터 도킨스의 진화론까지 설명하고 있다.
간략하지만 알차고 핵심을 말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쉽다. 
문과 출신인 나도 이해할 정도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도킨스의 저서를 일일이 다 보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때
알리스터 맥그리스가 알려준 정리가 꽤나 도움이 된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저자의 중립성이다. 
과거 무신론이었다가 개종한 사람이라 그런지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상당히 중립적이다. 
도킨스처럼 감정을 마구 드러내면서 전투적으로 쓰지 않았다. 
 
후반부에 가서 신 논증에 관한 부분은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꽤나 강한 주장을 담고 있지만 
도킨스의 과학적 진화론은 중립적으로 쓰려고 했다. (물론 중립이라고 해도 장단점은 있다.)
 

2. 과학만능주의자. 리처드 도킨스

약 십 년 전에 블로그에서 진화론을 가지고 익명의 댓글러와 설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그 사람은 도킨스의 [지상 최대의 쇼]를 소개하면서 왜 자신이 진화론을 믿는지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의 논리는 과학이 가진 맹점을 놓치고 있다. 
 
애초에 과학은 자연운행에 대한 "WHY"를 말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17C 말에 활동했던 "지암바티스타 비코"도 반박한 내용이다.
J.S.Mill을 필두로, 17C 엄청난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 과학이 모든 학문을 통일할 수 있다고 말한 통일과학주의가 팽배했던 시기에 자연과학의 한계성을 비판한 학자가 바로 지암바티스타 비코다. 

비코는 [새로운 학문(과학)]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연연구에 임하는 인간 지성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한다.
"우리는 자연을 설명, 예측하지만 왜 자연에 이런 규칙성이 있는지는 전혀 모른다."
예를 들어, 과학은 중력을 설명할 수 있다. 물이 100℃에서 기체로 변한다는 것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왜 지구에 중력이 있는지, 왜 물은 100℃에서 기체로 변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애초에 과학은 HOW를 위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즉, 진화론 또한 "목적론적 형이상학"을 피할 수가 없다.
진화론의 자연선택설도 결국 Why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How에 대한 답변일 수밖에 없다.
자연이 규칙적인건 알고 있는데, 왜 규칙적인지는 말할 수 없는 거다. 
 
적어도 내가 바라보는 진화론은 결과론의 그럴듯한 설명이다. 
도킨스는 과학이 철저한 증거에 입각한 대단한 것으로 포장하지만 과학 역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 여자에게 왜 가슴이 있는지 진화심리학에서 설명했다고 한다. 
인류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남성의 시선이 여성의 엉덩이보다는 상반신에 더 많이 머물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의 유방은 점점 위로 올라가서 가슴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모양도 보다 엉덩이를 닮은 모양이 되었다."

이것이 진화심리학의 설명이다. 난 믿지 않는다. 
 
그래서 도킨스의 진화론은 어찌 보면 과학만능주의와 닮았다. 
과학이 철저히 배제하고 있는 “왜”질문을 마치 과학이 다 해줄 것처럼 말하니 문제가 생긴다. 
그저 “우연일뿐이다”라고 설명하기에는 “왜”가 가진 함의가 상당히 많다. 

그냥 우연이라는 개념에 모든 걸 맡겨 버리느냐
아니면 종교나 철학처럼 우연이 아닌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가정하고 추론을 인정하느냐
그건 선택의 영역이지 논리의 영역은 아니다. 

3.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도킨스의 도발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이 책은 진화론이 틀렸다거나 기독교가 진리라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을 보면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프랜시스 콜린스처럼 창조적 진화론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P150-151)
 
즉, 신의 개입이 진화론에 영향을 주었다는 입장이다. 
진화론을 인정하면서 신도 인정하는 주장이다. 
(개혁주의를 비롯한 보수 기독교에서는 극렬하게 반대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보수교단 출신 'SFC'다.)
 
그렇기 때문에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다윈부터 멘델의 유전학 등 진화론의 역사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쓸데없는 허황된 이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런 전통 진화론과 도킨스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만약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창조적 진화론을 지지한다면 앞서 말한 비판도 이해는 간다. 
신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게 진화를 시킨다면 도킨스의 귀납적 결론은 비판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답정너인 개혁주의처럼 기독교를 박제된 교리 안에서 보지 않는다. 

P139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의 명언을 인용하자면, 전체 기독교 신학의 탐구는 마치 인간 문명과 같이 '어떤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며, 항구가 아니라 항해‘이다. 이것은 과학적 방법에도 정확히 동일하게 적용된다. 계속 탐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이런 발언에 과연 칼뱅주의자들은 동의할까? 
그리고 과연 기독교가 과학처럼 항해를 하고 운동하고 있다면 과거 틀린 신앙지식을 진리로 착각하고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종교가 이렇게 변화한다면 과연 절대적 진리라는 게 있기나 한가? 

그것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가 과연 그 진리를 찾을 수나 있을까? 

4. 물 만난 물고기 챕터 3~4장. 

 
알리스터는 3장부터 날아다닌다. 
1,2장에서는 굉장히 소극적인 반박만을 했는데 3장부터는 아주 철학적으로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과학이 아닌 철학을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알리스터는 비록 과학도이긴 하지만 자신이 잘하는 분야는 철학 쪽임이 확실한 것 같다. 
(1,2장까지는 머리를 감싸며 힘겹게 글을 쓰다가 3장에 와서 갑자기 알리스터가 신나서 글을 쓰는 게 보일 정도다. )

3장에서는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하나는 무신론에 대한 오해, 또 다른 하나는 네이팜탄에 대한 안타까운 역사다. 
 
첫째로, 종교와 무신론 모두 엄청난 대량학살의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은 신선했다. 

P220
20 세기 최고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종교가 살인 적이며 편협하고 압제적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살인, 편협함, 압제를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ex: 스탈린 1000만 명)


그렇다. 무신론은 종교가 행해온 악행들을 비판했지만 정작 나라나 이데올로기가 무신론이 되었을 때 종교가 저지른 것보다 더 큰 악행이 있었다. 
무신론의 손도 피로 더러워졌긴 마찬가지다. 
 
둘째로, P222-225에 나오는 네이팜탄 이야기는 정말 안타까웠다.  
베트남전에 사용된 네이팜탄에 대해 전문가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반인륜적인 무기였는지 그 이후 전쟁 때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켜 놓았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일본 도쿄에까지 네이팜탄이 쓰였을 줄은 몰랐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위 네이팜탄의 예를 들면서 "저 사례 때문에 '과학은 필연적으로 악하다'라고 할 수 없다."말한다. 

P226 

종교의 남용은 병적이고 파괴적이다. 다른 모든 인간의 활동과 생각처럼 종교도 개혁되어야 하고, 재평가받아야 하고, 수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4장 "밈(meme)에 대한 비판"은 마치 오컴의 면도날을 보는 듯했다. 
간결한 주장에 군더더기 없는 설명까지. 
도킨스가 굳이 "밈"이라는 잉여개념을 써서 이렇게 보기 좋게 반박당할까... 보는 내내 꿀잼이었다. 
 
 
 

5. 아쉬운 점

 
알리스터는 도킨스가 생물학을 다룰 때는 과학자처럼 철저한 증거에 기반한 과학자가 되지만,
종교를 다룰 때는 레토릭을 많이 쓰고 아주 얄팍한 전개로 결론을 맺는 성급한 사람으로 변한다고 비판한다.(P214)
그러면서 알리스터는 종교가 인류의 웰빙에 엄청나게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가 인류에 백해무익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종교와 웰빙의 관계는 반박으로서 적절치 못한 예시다. 
종교는 웰빙과 전혀 상관없다. 
인간 삶에 유익을 준다고 해서 종교가 진리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이 아주 건강해지고 윤택해진다고 해서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가난하게 된다고 해서 진리가 거짓이 되진 않는다. 
 
종교는 진리에 관한 절대적인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지 
인류의 행복을 목적으로 두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종교가 인류의 역사에 공헌한 만큼 진리에 가까워진다고 하면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며, 더 이상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인류의 행복과 관계없이 종교는 진리를 대변해야 한다. 
물론 인류의 행복과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종교 안에 인류의 행복도 필수조건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의 행복이 종교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또 하나 이 책이 가진 특이한 점은 알리스터가 성경구절 하나도 적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직 논리와 과학적 논증으로 도킨스를 반박했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독교 측면에서는 전혀 도움이 안 될 측면일 것이다. 
즉, 알리스터는 이 책에서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메커니즘을 방어하고 있다. 
만약 알리스터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를 방어했다면 기독교와 관련한 것들을 설명하며 논리적으로 이 교리나 사상이 왜 도킨스의 주장에 반박하는지 말했을 것이다. 
결국 이 알리스터의 반박은 기독교를 위한 반박이 아니라 종교인들을 위한 반박이다. 
따라서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기독교의 수호자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나처럼)
언제나 현실은 상상보다 잔인한 법. 크리스천들이여 기대를 버려라. 
 
알리스터는 마지막 장에서 "과학과 종교의 전투 개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 속에 설명하는 비과학적 묘사들은 여전히 과학 이론과 충돌하고 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속한 영국성공회는 과학과 종교를 화해의 장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한국 교회 입장으로서는 그리 반갑지 않을 것 같다. 
여전히 진화 없는 창조론을 고수하고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한국 교회는 "과학과 종교는 여전히 치열한 전장"으로 인식될 것이다. 
특히, 진화론(그것이 무신론적 진화론이든, 창조론적 진화론이든 상관없이)을 인정했을 때 벌어지는 아담 실종사고는 예수라는 인물까지 상징으로 만드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과학과 종교의 전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6. 결론 

이 책을 통해 배운 것들이 많다. 
단순히 논쟁을 보면서 꿀잼인 것을 넘어서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며 더 많이 알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아주 많이 늦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읽게 돼서 뿌듯하다. 
이제 죄책감 하나는 덜었다. 
 
모두가 리처드 도킨스에 쩔쩔매고 있을 때 빛의 사자처럼 등장해 그의 이론을 반박하는 그가 참 멋있다. 
종교를 떠나서 그의 이런 신사적인 논쟁은 언제나 배워야 할 가치다. 
 
아직 읽지 않은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책이 하나 더 있는데, 무려 883쪽이라 시작할 엄두가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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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또 하나 배운 게 있다면 "불가지론"을 창시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의 할아버지인 "토마스 헉슬리"가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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