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봤으니 남긴다

자식을 어떻게 잊어 [걸어도 걸어도]

거니gunny 2020. 1. 6.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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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걸어도 걸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뒷모습

 

★스포일러 내용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같은 공간에 있으나 함께 하지 못한 ‘보통’ 가정의 이야기.

 

사고로 죽은 장남 준페이를 기리는 날, 모두가 모였다. 식구들이 다 모여서 집안은 북적거리고, 할머니는 요리하시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모두가 명절 분위기를 내는데 계속 삐걱거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장남을 잃었다. 게다가 남은 아들은 초등학교 아이를 가진 사별한 여성과 결혼한다.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할아버지는 이 사실들이 못마땅하다. 장남은 자기를 따라 의사가 되었어야 했는데 죽었고, 그나마 살아있는 차남은 의사의 길을 걷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 할아버지의 못마땅한 모습은 결국 수차례 분위기를 가라앉힌다. 다시금 가족들은 냉랭해진 분위기를 애써 모른 체하며 가벼운 농담을 던진다.

 

출처: 영화[걸어도 걸어도]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츠시

 

하지만 진짜 반전은 영화 후반부에 나온다. 딸이나 며느리는 그걸 눈치챘을까.

오히려 무뚝뚝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비하면 감정이 훤히 보이는 순진한 사람이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자신의 마음을 꽁꽁 숨겨놓고는, 복잡한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연히 늦은 밤 아들과의 대화에서, 남편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얼마나 서운하고,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누구보다 장남을 잃은 것을 슬퍼하고, 료타가 유카리와 만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은 할머니였다. 어쩌면 그것을 드러내고 싶어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영화에 나온 자식들은 우리가 욕할 필요가 없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니까.

영화는 무서우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우리가 툭툭 던지는 지키지 못할 약속들.

언제나 자식들은 한 발 늦다.

출처: 영화[걸어도 걸어도] 유카리와 료타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이외에도 복잡미묘한 새로운 긴장이 존재한다.

료타의 가족이다.

유카리는 왜 료타와 만나는 걸까? 누가 봐도 아직 죽은 남편을 잊지 못하는 것 같다. 아들 아츠시도 마찬가지다. 죽은 아버지를 따라 자기도 피아노 조율사가 되고 싶어 한단다. 료타에게 아직까지도 ‘아버지’라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행동이 납득이 간다.

이 가족은 료타가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안다.

설령 전(前)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더라도, 죽은 아버지를 잊지 못하더라도 유카리와 아츠시는 료타가 필요했다. 현실을 살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좀 더 필요한가 보다. 영화 마지막 부분 산소를 찾는 료타가족의 장면을 통해 료타도 이제 정식 ‘아버지’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어르신들은 명절만 되면 자고 가라고 하신다.

어렸을 적엔 친척도 많고 복잡한데 왜 굳이 자고 와야 하나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어색한 사람들에게 인사도 드려야 하고, 마음대로 텔레비전도 못 본다.

재밌는 "미스터 빈"을 방송할 시간인데 이번 명절에도 보긴 글렀다.

게다가 어찌나 차가 막히던지. 24시간 가까이 꼬박 차 속에 갇혀 가야만 했다. 그때는 어려서 운전을 안 했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그것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반드시 자고 가는 게 효도하는 거라고. 안 자고 오면 그렇게 속상해하신다는 걸 우연찮게 알게 됐다.

 

우리가 점점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될수록 부모님은 점점 나이가 들고 주름이 많아지신다. 자식들은 언제나 한 발 늦는다. 후회한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마지막 료타의 내레이션이 왜 그렇게 먹먹한지 모르겠다.

 

영화가 보리차 같다. 보리차처럼 담백하고 끝에는 쌉싸름한 맛이 난다.

초반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캐릭터의 진짜 모습을 후반에 갈수록 보여주니까 여운이 더 짙게 남는다.

 

사람들이 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 박수를 보내는지 알 것 같다.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이야기가 최고로 멋진 영화가 되었다. 각본과 연출의 합이 잘 맞아떨어진 작품이다.

료타 역을 맡은 아베 히로시는 워낙에 유명하니까 반가웠지만 다른 배우들은 처음 본다.

최고의 캐릭터는 아무래도 할머니였던 키키 키린이었다.

원래 일본 가족 분위기가 이런 건가 낯설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P.S.: 옥수수튀김 한번 꼭 먹어보고 싶다.

 

노랑나비네. 저건 말이다, 겨울에도 죽지 않았던 나비가 이듬해에 노랗게 된 거래

 

증오할 상대가 없는 만큼 괴로움은 더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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