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시트콤에 있었던 내용이다. 한 주부가 자신이 “폐경”이라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는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뭐 대수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 없는 남편은 심술이 난다. 이윽고, 남편은 시위라도 하듯, 모든 사건들을 폐경 탓으로 돌린다. “이게 다 폐경 탓이야”라고 억지논리를 펴는 남편의 어처구니없는 시위로 시트콤은 마무리 된다.
[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보면서 그 시트콤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아마도 문제의 원인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저자의 논리가, 시트콤에 나오는 남편과도 같아서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성경을 한 쪽으로 치우쳐서 보지 말고, 양쪽의 모순을 모두 끌어안아야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한 쪽으로 치우쳐서 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이 목표하는 바는 분명 고무적이다.
요즘 한국교회를 문제 삼으면서 그 실패의 원인을 신학자체로 보는 접근이 전에도 과연 있었을까? 그 점에서 저자의 접근은 통찰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이 책을 신학자들만 볼 수 있게 하지 않고, 대중들도 볼 수 있게 쉽게 풀어서 썼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카톨릭, 칼뱅주의 그리고 아르미니우스 주의까지 한 책에 모두 담기 힘든 분야인데, 저자가 많이 애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카톨릭이 말하는 면죄부의 진정의 의도와 교리를 쉽고 알차게 배울 수 있게 된 것 같다. 또한 나의 신앙받침 역할을 해주었던 신앙교리에 대해 너무도 내가 무지했구나 라는 반성도 하게 됐다. 어렸을 때 신앙 강령만 외우고, 정작 그 안의 내용을 배우지 못한 것은 필시 나의 부족함 탓이리라.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불편했던 부분들이 있다. 사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처음에는 몇 부분만 책갈피를 하려고 하였으나, 나중에는 책갈피를 따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만 뽑자면,
1. “요즘따라 구원인 듯 구원 아닌 구원 같은 너~♪”
최근 “밀양”이라는 영화를 통해, 값싼 구원론이 어떤 내용인가를 다룬 부분에서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저자는 만약 영화에서 살인자가 2-3세기 초대교회에서 살았다면 영화와 같은 아이러니는 일어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만약 살인범이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면 초대교회는 먼저 그의 고백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검증하려고 했을 것이다. (p.69)”
최소 3단계에 걸쳐 수년간의 검증 끝에 교회는 진실한 회개를 했을 경우에 살인자를 교인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위 이야기를 네 글자로 표현하고 싶다.
“행위구원” 또는 “구원열매”
살인자가 만약 수년간 교회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교회는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만약 그가 진정으로 회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하여 교회가 원하는 조건을 다 충족시키지 못했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그럼 이게 행위구원이랑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만약 저자가 이것이 “행위구원”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이것은 “구원열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저자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배중률에 걸리는 꼴이 되고 만다.)
이 살인자의 경우 저자가 원하는 방식의 From A to B의 구원이 과연 성립될까?
사실 이러한 설명은 유대교랑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모두 100점을 맞을 수는 없겠지만, (예를 들자면) 70점까지는 맞아야 구원받는다는 논리다. 이것이 행위구원론이 아니고 무엇인가?
덧붙여 저자는 노예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노예가 교회를 가려고 한다면 주인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만약 주인이 “내 노예는 선한 사람이 아니오.”라고 하면 두 말 않고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p.69)
그렇다면 만약, 주인이 노예에게 악의를 품고 거짓말로 그렇게 얘기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영락없이 그의 회개는 거짓부렁이 될 것이고, 그는 거짓말쟁이가 되어 교회의 저주를 받을지도 모르겠다. 설령 주인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노예는 교회를 못가는 이유가 주인에게 선하게 행동하지 못해서인가? 이것은 120% 행위구원론이다. 이 세상에 선한 노예만이 교회에서 받아준다는 논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값싼 구원은 문제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을 얻기 위해 단계적으로 행위를 하는 것은 행위구원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한 ‘열매’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하는 행위는 절대 옳다고 볼 수 없다.
저자는 필립얀시의 말을 빌려서, 이 시대의 기독교신앙이 너무 서신서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문제다라고 말한다. (p19)
좋다. 그러면 예수님이 등장하는 복음서로 가보자.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장면을 비유로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적을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다. 하지만 세리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고개를 숙이고 죄인에게 자비를 달라고 기도한다. 예수님이 과연 누구에게 의롭다함을 칭하셨을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바리새인이 교회에 들어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우선 바리새인 처럼 일정기간 회개하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또한 토색, 불의, 간음을 하지 말고, 세리처럼 간사한 일도 하면 안된다. 그리고 회개금식을 일주일에 두 번씩 해야하고, 꼬박꼬박 소득의 십일조를 내야한다. 교회는 이러한 바리새인의 행동을 보고, 정말 회개한 것이라 판단하고, 교인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세리는 교회 문턱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하나님께 가슴을 치며 회개한 것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가히 충격적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세리) 저보다(바리새인)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후략)”(눅19:14)
예수님이 왜 세리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셨을까? 바로 진정한 회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가 말하는 아르뱅주의가 문제라면 예수님도 문제다.
우선 세리의 회개는 어느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본문 속에서는 교회공동체가 알고서, 3단계를 거쳐 구원의 자격(?)을 주는 어떠한 암시도 있지 않다.
의롭다함에 필요한 것은 행위적인 표현이 아니라, 회개함이다. 문제는 이 땅의 모든 교회 사람들이 “진정으로”회개 했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열매로 알면 된다.
물론 이 비유가 구원을 100% 설명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이 비판했던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행위구원을 우리가 끌어안으면 안 된다.
2. 꽃보다 성경, 성경보다 진리?
정말 놀라운 사실은 이 책이 신앙서적이고,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한 적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보다 2~3세기 교회공동체가 사용했다고 하는 문헌들을 제시하면서, ‘이것 봐라 교회공동체는 이래야 한다.’라고 말한다.
저자가 성경을 잘 인용하지 않은 이유는 또 따로 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도 얼마든지 왜곡되거나 오용될 수 있다. (중략) 한국교회의 면죄부는 개신교회의 성서주의라는 정당화 장치로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 주장 때문에 그렇나 짜깁기된 구원의 확신 공식이 마치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양 여겨져서 함부로 비판하기가 두려운 것이다."(p98~99)
나는 성경이 아닌 다른 문헌에서 교회공동체가 무엇을 했는지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과연 성경이 어떻게 말했는지가 궁금하다. 안타깝게도 이 책은 성경보다는 2~3세기 문헌들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나보다.
저자는 칼뱅주의가 ‘성서에 기초한, 성서로부터 수립된 가장 논리적이고, 일관성있는 교리’라고 설명한다.(p.112) 하지만 그것이 칼뱅주의가 가진 ‘양날의 검’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일관성도 없어서 칼뱅주의가 성경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만 짜깁기 할 수 있기 때문이다.(p113~114)
성경을 통해 이성적으로 어떻게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럼 잘못된 것인가?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이 이성이 있다는 것인데, 성경은 모순투성이니까,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닥치고 받아야 하나? 모순투성이라고 할 거면, 성경은 왜 보나? 성경만큼 위험한 존재도 없지 않나?
3. 신학이 신학이어서는 안 된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칼뱅주의와 달리, 다른 신학들은 논리적으로 일관적이지 않게 성경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얘긴데, 그러면 신학이 왜 필요한가? 본디 신학이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가장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는 학문 아닌가? 물론 칼뱅주의가 100% 성경과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 성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러한 이해 속에서 그분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 맞지 않나?
예를 들어, 칼뱅주의가 말하는 TULIP교리는 저자가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교리이기도 하다.
그중에 "L"에 속하는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에 대한 칼뱅개혁주의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표적인 개혁주의자이자 복음주의자인 존 파이퍼는 그의 책 [Does God desire all to be saved?(하나님은 정말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는가?)]에서 “하나님은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시나,(딤전4:2, 벧후 3:9, 겔18:23, 마23:37) 그와 동시에 구원받을 이를 선택하신다.” 라고 얘기한다. 존 파이퍼도 이 모순에 대해 인정하는 바이나, 성경 여러 곳에 이러한 하나님의 바라심(desire)과 그분의 계획, 의지(will)가 다르게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모순이 있더라도 이렇게 (이성적으로 성경을) 설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비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설명했다.
최소한 칼뱅주의는 성경 모두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누구처럼, 성경은 모순투성이이니, 차라리 2~3세기 문헌을 많이 인용하는 것이 더 신빙성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4. Sound text
저자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자가 비판한 덕분에 내가 믿고 있는 교리를 더욱 확실하게 붙잡을 수 있게 되었고, 내가 믿는 신앙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깨닫게 됐다.
거듭난 크리스천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다시말해서, TULIP교리 중 마지막 교리인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은 과연 맞을까?
저자는 칼뱅주의자들이 성도의 영원한 안전을 강조하는 것이 무적의 순환논법이라고 비판하지만, 이 내용은 성경 곳곳에 드러나 있다. 해석이 애매할 수 있는 히6장을 떠나서도 말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3~24)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
다시 말하지만, 저자가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에도 제법 일관되게 성도의 견인을 말하고 있다.
5. 불친절한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점은 부연설명을 안하고 끝낸다는 것이다.
성화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고전3:15에 대한 얘기를 한다.(p252) 부끄러운 구원을 받지만, 성화는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고로, 성화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다)을 비판한다. 그런데 고전 3:15은 사실 ‘이렇게’해석해야 하는 것이 맞다라고 부연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것은 전혀 없다.
6. 서평 마무리...
끝으로, 저자는 마지막장에서 자신의 새로운 구원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비판하지 않으려한다. 다만, 성경을 “묵시적 표현”이라고 치부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곳만 쏙쏙 빼서 인용하는 모습이 정작 자기가 앞서 칼뱅주의를 비판했던 내용과 너무나흡사해서 적잖이 당황했다는 사실만 말해두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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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대해 할 말이 많기도 하고, 동시에 없기도 하다.
물론, 현재 한국교회에서 회개에 대한 메시지보다는 구원의 은총,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메시지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교회에서도 “살인죄나, 미워하는 죄나 똑같습니다.”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가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형제간의 화목이고, 화해다. “성화”라는 개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만약 교회에서 회개만하면 다 구원받는다고 하면, 굳이 매주 교회 갈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모든 한국 교회가 회개를 통해 죄의 평등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앞서 말했지만, 저자는 문제점(한국교회의 윤리적 문제)을 지적하기는 잘 하였으나, 문제에 대한 원인분석을 잘 하지 못한 것 같다.
진정한 크리스천은 거듭난다. 거듭난 크리스천은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 부단히 노력한다. 물론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죄를 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려 노력하고 기도한다. 다시는 죄에 지지 않게 해달라고 말이다.
저자는 개신교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남겨 두었어야할 교회공동체론을 폐기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저자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겨 두어야할 은혜와 성화를 폐기한 것이 더 안타깝다.
P.S.: 독자들을 조금이라도 배려한다면, 500페이지가 넘는 책에 대한 주석처리를 각주로 처리해주었으면 한다. 아무리 주석 내용은 의미없다해도 나처럼 주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은 두꺼운 책을 이리갔다 저리갔다 불편하게 봐야한다.
저자가 프랑스 철학자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마 그의 신앙 기준은 폴 리쾨르, 자끄엘룰의 신학, 철학 사상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들의 사상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그것에 대한 반박을 하지 못해 비통한(?) 심정이다.
2020년이 되고 나서 이 서평을 다시 보니 내가 많이 변했다는 걸 새삼 느낀다. 이 글을 쓸 때만 하더라도 믿음이 충만했었는데,...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어버렸다니, 참 인생 모른다.
지금은 신광은 저자의 말이 상당부분 이해가 간다. 내가 했던 비판들이 어찌보면 상당히 근시안적인 비판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느낄 수 있다.
평생을 '무오류'라고 믿어왔던 성경의 정경성을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볼 때, 저자가 말한 결점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제 성경은 2000년 전 많은 이들의 손에 거친, 오래된 문서일 뿐이란 걸 인정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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