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현대를 위한 성령론]
현대를 위한 성령론
크레이그 S.키너
신앙적으로 힘든 사람에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아마도 ‘의심’일 것이다.
내 경우엔 ‘아. 내 안에 정말 성령님이 계신 걸까?’라는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
정말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드는 생각일 것이다.
(아직도 이런 고민이 없이 그냥 예수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고민해보길 강력히 추천한다. 그런 질문이나 고민을 안 했단 얘기는 마치 성인이 되기까지 인생 살면서 건강검진 한 번도 안 받는 거랑 똑같다고 생각한다. 일부러 의심병 때문에 검사받는 게 아니다. 내가 정말 건강한지 테스트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받는 것이다. 우리 몸 보다 1,000,000배 이상 중요한 우리 영혼에 관해 건강 테스트를 하는 것은 참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생각이다.)
과연 성령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걸까? 내 안에 정말 성령님이 계셔서 역사하고 계시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과연 어느 정도 범위까지 역사하고 계시는 걸까? 오순절 교단 사람들처럼 방언을 해야만 성령님이 계시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는 걸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도행전처럼 여러 기적적인 은사들이 일어날까?
이 책은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지금도 계시고, 역사하고 계셔요”라고 시원하게 말해준다.
저자 크레이그 키너는 자신을 직접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고 목격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는, 양극단의 신학을 모두 배운 자로서, 오늘날에도 성령님을 역사하고 계시며 양쪽 신학 모두를 장단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첫째로, 책을 보면 저자가 성경 구절을 묵상을 많이 한 티가 확실히 났다.
단순히 교리적인 차원에서 얘기하지 않고, 성경 한 구절 한 구절, 심지어는 한 단어도 버리지 않고 초점을 맞춘다. 단순히 신학을 공부해가지고는 이런 풍성한 성경 구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루에도 40장씩 성경을 읽는다는 게 신학자로서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크레이그는 이성과 계시를 모두 가져가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둘째로, 저자는 책 앞부분을 통해 자신이 어떤 신앙적 환경 가운데 살아왔는지 간단하게 얘기했다.
침례교단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고,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도 만났으며, 개혁주의 계통의 보수신앙 사람들과도 계속 교제하고 있다고 한다. 저자의 이런 독특한 환경은 이 책의 또 다른 강점이다. 한 쪽 신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과 여러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어떤 신학적 입장을 얘기하더라도 자신 있게 자기만의 입장을 피력한다.
저자는 달라스 윌라드의 예를 든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성경에서 행하셨던 것과 똑같이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점을 의심하는 이들은 일종의 “성경 이신론자”라고 말한다. 원조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신 다음에는 뒤로 물러나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반면,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하나님이 성경이 완성되자마자 뒷전으로 물러난 것처럼 행동한다.”(p.158)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리라 믿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저자는 이러한 ‘상식적인 성경 해석’을 통해 은사지속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은사중지론자들의 입장도 놓치지 않고 말한다.
존 맥아더의 주장을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그는 존 맥아더가 제시하는 은사주의의 위험요소를 인정한다.
셋째로, 평소 생각지 못한 새로운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고전 12:8-10을 보면 바울이 열거한 은사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믿음” 또한 은사 중 하나라고 취급하고 있다. (p.210) 믿음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 전부가 가지는 것이 믿음 아닌가? 그런데 그런 믿음이 여러 은사들 중 하나라고 얘기하는 것이 마치 뭔가 더 대단한 믿음이 은사로써 존재한다로 들린다. 정말 그럴까? 남들보다 특별한 “믿음”의 은사가 있을까?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사실, 아쉬운 점이 참 많았던 책이다.
첫째로, 책을 읽는 내내 아쉬웠던 점은 역시 번역이었다.
아니 어쩜 이렇게 번역을 직역할 수가 있지?? 도대체 한글인데도 무슨 말인지 몰라 책 읽으면서 한숨을 쉬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 심하게 얘기하면, 번역 때문에 책을 계속 덮었다. 한 문장이 대체로 길면, 그것을 잘라내는 것도 번역의 능력인데, 한 문장이 시작되고 나서 마침표가 네, 다섯째 줄 밑에 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면 독자가 그걸 어떻게 소화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일반인이 말이다.
유시민 작가는 외국어를 직역한 글은 “직역”이 아니라 틀린 글이라고 얘기했건만...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책이었다.
두 번째로 아쉬웠던 점은, 성경 구절의 오남용이다. 성령에 관한 주제로 책을 쓰면서 이 정도로 많은 성경 구절을 인용한 책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는 아주 좋은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문장을 쓰고서 참고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준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제는 그 구절이 실제 하려는 얘기와 관계가 많이 없을 때가 적지 않았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엘리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무언가를 알려주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불안해하는 것으로 보였다(왕하 4:27)”라는 주장이 있었다. (p. 35)
하지만 왕하 4:27은 저자의 말처럼 불안해하는 모습이나 묘사가 없었다.
실제 성경 구절은 이러하다.
왕하 4: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단지 엘리사도 모른다고 말만 했을 뿐, 그 여인의 말을 들어보자고 하기만 했다. 이 구절에서는 엘리사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불안하거나 초조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400페이지가 가까운 책인데 대부분 이런 식으로 한 문장 써놓고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괄호로 인용해버렸다. 처음 부분을 읽을 동안에는 모든 구절을 일일이 찾아보려고 성경책 옆에다 펴놓고 읽었지만, 책 읽는 내내 계속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구절 찾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이런 불친절은 차치하고서라도 인용한 구절들이 주장과 맞는 구절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구절들까지도 써버린 것은 문제가 있다.
아마 작가도 그것을 의식했는지, 성경 구절을 일부러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 것 같다. 단순히 괄호 안에 성경 색인만 해놓고 밝히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작가의 신용에 있어서 치명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로, 저자의 가장 중요한 강점은 곧 가장 치명적인 결점이 된다.
저자는 앞서도 말했듯이 양쪽의 입장을 모두 끌어안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은사주의자들도 완벽하지 않고, 은사중지론자들도 성경을 편한 대로 해석했기에 문제가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반대로 얘기하면, 이 책은 뚜렷한 주장이 없다.
‘A도 맞고 B도 맞다’ 이런 식이다.
기적이 일어나는 현장도 있지만 아닌 현장도 있다.
성령이 강력하게 기적을 행하시기도 하지만 아닐 때도 있다.
독자가 알고 싶은 건 이것도 저것도 옳다는 식의 물타기가 아니다.
‘정확히 어떤 상황에서는 이런 점들이 일어나고 저런 상황에서는 또 다른 점들이 일어난다’라고 해줘야 글의 흐름이 일관되게 보이는데 이 글은 너무 중립만을 강조하였다.
저자는 이런 중립적인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다 열정적으로 추구한다는 이유로 다른 그리스도인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p.272)
저자 말대로 우리는 진리를 전부 알 수 없기에 자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100% 확신할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이런 태도, 즉 오순절이든 비 오순절이든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계속 각자의 의견을 조율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는 선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그 과정 속에서 불가피한 비판과 논쟁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란, 답이 있는 개념이다. 진리라는 답이 둘 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두 개의 정답은 서로 배타적이며 동시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나에게 1-1=0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쪽에서 1-1=2라고 한다면 당연히 비판하고 비교해야 한다. 이 작업을 모두 “비난”이라는 색안경으로 봐서는 안 된다.
무조건 서로를 존중하자라는 말은 다원주의자가 되자는 말이나 똑같다.
아직은 답이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위치 아닐까? 아니면 우리는 불가지론자와 무엇이 다를까?
네 번째로, 책을 읽으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몇몇은 옥성호 씨의 책을 통해서 생겨난 것이고, 몇몇은 혼자 생각하며 생겨난 문제들이다. 특히, 방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럼 방언을 통역하는 통변의 은사 가진 사람은 왜 이리도 적을까?”이다.
방언은 보수교회 빼고는 거의 전부다 하는데 통역한다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조금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0%에 가깝다. 은사의 기형적 분배 현상을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방언은 성령세례의 첫 번째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그에 따른 방언 통변도 그만큼 존재해야 하지 않은가?
이러한 문제들은 이 책이 설명해 주고 있지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함께 봤던 책이 있었는데, 둘 다 옥성호 씨의 책이다.
하나는 비교적 최근에 읽었던 [숨겨진 야고보를 찾아서]였고, 또 하나는 이 책의 주제와 맞닿아있는 [방언,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이다. 확실히 옥성호 씨의 [숨겨진 야고보를 찾아서]를 보고서 이 책을 보니까 옛날과 다르게 한 소절씩 다가왔다. 머릿속으로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고 있다. 속단하긴 이르다. 이번 [현대를 위한 성령론]은 그야말로 “성령에 대한 입문서”나 마찬가지다. (신학교에 과목이 있었다면 [성령학개론]에 볼 만한 책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성령님과 은사에 대한 마중물이 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제 앞으로 비교 신학 시리즈 책도 볼 예정인데, 아마 그 책을 읽으면 또 새로운 혼란과 학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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