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7일이라도 운 게 어디냐[복음이 울다]

거니gunny 2020. 12. 1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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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울다 

 


[래디컬]의 저자 데이비드 플랫의 다른 책이다. 
래디컬은 자신의 신앙 철학이 담긴 책이었다면, 이 책은 에세이에 가깝다. 
래디컬을 읽었을 때 나도 마음이 뜨거웠었다. 
‘그래! 신앙은 나누는 것이지! 이렇게 살아야지!’ 말로만 떠드는 신앙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하는 신앙인을 보여줘서 좋아했었다. 
존 파이퍼가 선교 도전 책 [열방을 향해 가라]에서 말한 것처럼 정말 전쟁상황처럼 살고, 모든 것을 아끼지 않으며 나눌 줄 아는 신앙인.  그런 신앙을 데이비드 플랫이 보여주고 있었다. 

2019년에 이 책이 나온 것이라면 꽤 오랜 기간 흘렀을 텐데 데이비드 플랫은 여전히 “래디컬”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좋았던 점들

 

1. 솔직하다. 

데이비드 플랫은 히말라야에 처한 상황을 보고 기만하지 않았다.

자기감정에 솔직했고, 양심적으로 책을 써 내려갔다. 

 

태어나자마자 온갖 백신 접종을 맞고 두 다리 건강하게 자라며 교회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예수님을 믿은 데이비드 플랫.  
그에 반해 태어나자마자 백신은커녕 깨끗한 물을 마시지 못해 콜레라 및 각종 질병을 고스란히 맞이해야 하는 히말라야 아기들. 두 다리 제대로 건사하면 그나마 다행. 게다가 교회는커녕 예수의 “예”자도 들어보지 못한 채 평생을 살다 죽는다.  
그리고 죽음 이후 심판을 맞이해야 하는 인생.  
데이비드 플랫이 무기력감에 빠진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p76)

설교란 사람들에게 의심과 회의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 힘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더 큰 질문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걍 믿으세요"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쉽다. 

적어도 데이비드 플랫은 그런 식으로 쉽게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다. 

쉽지 않지만 솔직하게 아이러니한 히말라야의 상황에 고뇌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린다.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의인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죄인인 줄 잘 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나님은 공 의로우시다. 하지만 내가 본 광경들과 사랑 많으신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어떻게 융화시켜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P268)

2.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히말라야에 평생 살았던 사람들은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불교를 믿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가 평생 그렇게 배우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사람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그저 동네 승려가 알려준 대로 배우고 믿었을 뿐이다.  
적어도 나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많은 종교를 듣고 배웠다. 선택권이 있었다.  
과연 세상은 공평할까?  
저자가 했던 고민을 다시 해본다.  
왜 2천 년 전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전 세계 사람들이 모를까?  
과연 하나님은 공평하신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핑계치 못하는 인간이라고 치부할 것인가?  (p115,116)

 

3. 짧은 7일의 경험이지만 그게 어딘가?!!

처음엔 좀 실망했다.

'고작 일주일 간 거야?? 그러면서도 히말라야 사람 다 됐다고 생색내는 거였어??'

적어도 2~3년은 있어야 현지인 취급받는 거 아닌가?

7일의 짧은 여정 속에서 뭘 얼마나 느꼈다고 이렇게 책으로까지 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7일 살아놓고, 삶이 어떠니, 내려놓음이 어떠니 얘기하는 게 마뜩잖게 여겨졌다. 

하지만! 
비록 짧디 짧은 7일의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이 땅에 모든 성도가 데이비드 플랫이 가진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공유하고 헌신하고자 한다면 정말... 정말 이 땅은 바뀔지도 모르겠다.  
선교하러 간답시고 하루, 이틀 반짝 교회 방문하고, 나머지는 신나게 수영장 가는 그런 관광 선교 말고,

정말 데이비드 플랫 일행처럼 현지인들과 동일하게 경험하고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나라 교회도 정말 바뀌지 않을까?

 

4. 진짜 예배란?

P163  
선교현장에서 본 예배의 모습은 한마디로 뜨겁다.

현지 영혼이 없이 우리끼리 드리는 예배도 뜨거웠고, 현지 영혼이 와도 그 예배는 활기찼고 은혜가 넘쳤다.  
비록 신학 전공한 목사가 전하지 않아 때로는 말씀이 이상해도 , 한국에서 드렸을 때 느꼈던 지루함과 나태함은 느낄 수 없었다.  
오해하지는 말자.  
기독교는 ‘느낌’으로 가는 종교가 아니다.  
분명 합리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말씀이 있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된 책, 성경이 있다.  

그러나 느낌이 아예 없는 종교도 아니다.  
예배에 감격이 있어야 하고,  
말씀에 진실한 뜨거움이 있어야 하고,  
찬양에 눈물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조화가 이루어진다면 그 공동체야말로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교회가 아닐까?  

과연 한국교회는 조화가 이루어진 교회일까?

 

과연 이 책을 개혁주의자가 본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시편 찬양 안 부른다고 불편해하고, 오로지 교리에만 목메는 사람들은 이 히말라야 신앙인들의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까? 해외선교에 잠깐 맛 본 나로서는 이 곳 히말라야 교회가 체계적인 교리를 가르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단 교리 안 가르치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처지다.  기독교강요는 커녕 TULIP 교리도 당연히 모를 히말라야 교회.

과연 개혁주의자들은 이 책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5. 내가 타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  
난 종교학 전공자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외 타 종교를 알면 알수록 그 교리의 조악함 때문에 거부감이 든다.  
토속신앙으로 악마를 섬겼다던 히말라야의 한 가정. 
5살도 채 안 된 아이를 앉혀다가 ‘너는 흉일에 태어났으니 어두운 방에서 악마에게 매일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 비이성적인 종교를 보노라면 ‘아... 그래도 기독교가 그나마 낫다’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기독교를 떠나서, 어떻게 악마를 섬길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일본 사람들도 참 대단하다. 일본 만화책 보면 다들 말하는 게 신들 노엽게 하지 않는 게 그들 인생의 최대 목표라고 한다;;  

착하고 자비로운 신은 정녕 어디에도 없단 말인가??  

(대승불교에는 '보살'의 의미가 있어서 어느 정도 선한 이타적인 신이 나온다. 그래서 아시아 전역에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나 보다. 하지만 기독교, 불교 외 선하고 착한 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게 참 이해가 안 된다.)

아쉬웠던 점들.

 

1. 돈을 소유하는 것이 죄악이라지만...  
부자가 되어서 자기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난에 허덕이면서 남에게 도움받는 삶도 부끄러운 삶이다.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음에도 벌려고 하지 않는 삶은 게으른 삶이다. 이런 게으른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고??  난 아니라고 본다. 아굴의 잠언을 보라!(잠 30장) 

 

2. 질문은 했는데, 도로 아미타불??

이 선택 사항에 관해 생각할수록 그것이 죄의 본질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할 때 세상에 죄가 들어왔다. 남자와 여자가 무엇이 좋은지에 관한 자신들의 판단이 옳고 하나님이 틀렸다고 생각할 때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P124-125)

앞에서 자기 양심에 귀를 기울였던 데이비드 플랫.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 자체가 "죄"라고 단정 짓는다. 마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담이 저질렀던 선악과 사건이랑 비슷하다면서...

하나님 말씀에 토 달지 말라는 얘기로 들린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맹신할 수가 있는가?

기독교는 '겸손'이라는 명목 하에 의문을 갖지 못하게 만들며 이를 죄악시 여긴다.

히말라야를 간 데이비드는 정말 합리적인 질문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그냥 멈춘다.

이럴 거면 히말라야를 왜 갔는가?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는데... 

 

 

 

@마무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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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돕는다는 것.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부자가 돈이 많아서 도와주기도 할 테지만 사실 도움을 두는 손길들 중에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도움의 손길이 과연 이성적이냐 하는 것이다. 

도움을 줄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보상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사람에게 더움을 주는 것이 과연 이성적일까? 
누가 봐도 인생낭비요, 전력 손실이다. 그런데 인간은 기꺼이 그런 낭비를 자처하며 살아간다. 
여기에 기독교라는 중요한 사상이 들어간다. 
기독교라는 사상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움이 인생 낭비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목표요 목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맞느냐 틀리냐를 떠나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도움, 봉사가 전혀 아깝지 않다. 
결국 기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돕게 하는 힘의 원동력이 된다. 
기독교만큼 다른 종교에서도 그런 원동력을 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안에만 머무는 따뜻함.  
교회 안에서만 보이는 예수님의 사랑.  
데이비드는 예수님의 사랑과 턱없이 다른 현실에 괴로워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떡 목사와 닥믿 성도들.

알곡들의 이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워낙 사기 치는 성도가 많다 보니 이제 뉴스에 교회가 나와도 더 이상 충격적이지 않다.

언론들도 버린 한국교회.

“교회에 쭉정이가 많아서 그래”라고 하기에는 뭔가 빠져있다.  
내가 겪은 교회도 마찬가지.  
교회를 떠난 95%의 사람들은 신학이 달라 떠나지 않는다. 사랑이 보이지 않아 떠난다.  

 

한국교회가 이 책을 보고 조금이라도 각성한다면, 

"개독교"라는 욕을 듣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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