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으니 남긴다

욥기는 판타지 소설이어야 한다[너무도 가벼운 고통]

거니gunny 2021. 7. 2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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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성호 [너무도 가벼운 고통]


오랜만에 돌아온 옥성호 씨의 신작

"고통"에 대한 책은 예전에도 읽은 기억이 있다.

필립 얀시의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부터 존 파이어 [하나님은 어떻게 악을 이기셨는가],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 등

고통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성경은 무엇인가?
단연 욥기서이다.
하지만 온전히 욥기를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많다.
갑자기 등장하는 엘리후의 책망과 하나님의 동문서답부터가 항상 문제다.

신앙심이 뜨거웠을 땐 하나님의 동문서답을 보면서도
"아... 역시 하나님은 오묘하신 분이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을 인정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은혜로 넘겨버렸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내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치부하며 넘긴 것이다.
[너무도 가벼운 고통]을 읽고 난 후 생각해보니, 이건 내 지식과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지식이 뛰어난 누구라도, 믿음이 투철한 누구라도 성경 번역본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

1.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 욥기

이제까지 옥성호 씨는 기독교에서 정말 중요한 교리를 비판해 왔다.
부활론이나 기독론, 모세오경 같은 것들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는 아니다.
영혼과 구원에 관한 중요한 문제임에는 틀림없지만 추상적이고 교리적인 내용에 가깝다.

하지만 욥기는 다르다.
어느 누구도 삶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구체적이며, 딱딱한 교리보다 실천적인 삶에 가까운 주제다.
그래서 욥기를 보는 우리의 자세는 더욱 정직해야 한다.
우리의 상식과 양심에 맞추어 나가야 한다.

양심에 정직하게 반응할 것인가 아니면 교리라는 벽 뒤로 숨어버릴 것인가?

2. 이쯤 되면 번역가들 얼차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욥기의 최대 배신자는 "번역가"들이다.
얼마나 번역본의 배신을 느꼈냐면 이 책을 보고 있자니 크리스천들이 불쌍해졌다.

"성경은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엉터리 번역본으로 이제까지 믿었다는 게 불쌍하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성경 원본 자체의 의미만 잘 전달되었어도 지금처럼 왜곡된 기독교를 믿지는 않았을 텐데…
오로지 감추기에 급급한 신학교도 큰 문제지만
번역을 엉터리로 하면서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것도 큰 문제 중 하나다.

번역이 가진 결점 때문에 기독교는 철저하게 욥을 오해하고 있다.
그야말로 난장판 속에 만들어진 욥기.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번역본을 온전한 성경으로 믿고 예배해왔다.
너무 허망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이 드는 건, 한 때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가 열풍이 불었을 때 그 열풍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정도다.
(아무리 생각해도 [메시지]는 소설이지 성경이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제까지 기대하고 신뢰해왔던 욥기의 교훈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3. 교회 리더십이 반성해야 하는 이유

옥성호 씨가 풀이한 욥기서는 교회에 적잖은 충격을 던져줄 것이다.
설령 옥성호 씨가 제기한 질문들 중에 절반만 맞다고 할지라도 나머지 절반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며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욥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교회가 왜 욥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을까?
무조건 예수 십자가와 연결된다는 교리 때문에 구약은 너무도 많이 의미가 변질되어버렸다.
교회 안에는 깨지 못한 침묵의 카르텔이 너무 많다.
아름답고 화려한 십자가에 너무 꽂혀서 그것과 조금이라도 핀트가 빗나간 것이라면 이단이라 치부하고 신경 쓰지 않는다. 이건 교회의 잘못이고, 신학교 교수들의 잘못이고, 목사들의 잘못이며, 마지막으로 성도들이 무지한 잘못이다.
우매한 성도들을 아직도 조종하고 있는 교회 사역자들은 정말 반성해야 한다.

필사노트를 왜 줬나요??

# 아쉬운 점
1. 왜? 왜 성경 필사 노트를 별책으로 주었을까?
나에겐 전~혀 필요 없는 필사 노트.
심지어 저자가 본문에서 계속 지적하는 게 번역의 문제점 아니었던가?
그런데 "필사 노트"를 부록으로 주다니?? 너무 모순적이지 않나?
정말 필요가 없어서 책만 따로 사려고 했는데 온라인으로는 세트로만 판매한다고 해서 구분해서 구입할 수가 없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욥기를 필사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정말 옥성호 씨는 독자로 하여금 필사를 하면서 “깨닫기를” 바란 것일까?
옥성호 씨가?
차라리 책만 팔고 책값을 2,3천 원 저렴하게 팔았으면 좋았을 것을…

2. 옥성호 씨! 왜 각주로 안 하고 미주로 책을 만들었어요??
이제껏 옥성호 씨의 책은 거의 다 각주로 부연설명을 해왔다.
그래서 굳이 뒷 페이지를 찾을 필요 없이 바로바로 부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엔 너무 안타깝게도 미주로 부연설명을 해버렸다.
옥성호 씨 본인도 미주가 아닌 각주가 독자에게 더 좋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왜 각주로 안 해줬을까?
그의 부연설명을 읽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데 이래 버리면 난 어떡하라고!!
덕분에 열심히 책갈피 해가며 책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읽어버렸다.
제발 다음부터는 각주로 책을 만들어주세요!!

3. 소설과 역사 사이
항상 옥성호 씨를 비판하는 내용 중 하나가 이것이다.
역사적인 자료를 근거로 내세우지 않고 소설처럼 빈 공간을 마음대로 지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적지 않은 부분에서 스토리 상 공백인 부분에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한 티가 많이 났다.
물론 그 시도가 아예 불합리하거나 말도 안 되는 비약적 논리는 아니다.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다. 빈 공간을 메우지 않으면 더 이상 스토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리를 만들어버리면 이 역시, 창작의 영역으로 들어가 버린다.
"욥의 침묵으로 하나님이 초조해한다고 단정 짓는" 다거나 "주변 천사들이 지겨워한다"거나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 같아 아쉽다.


🎁 누가 양심적인가?

옥성호 씨가 변질되었다는 사람들이 많다.
겉으로 봐선 그래 보인다.
과거 보수신학의 정점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왕팬이라고 자처했던 사람이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거룩한 분노로 쓰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는 성경 자체를 아예 난도질하고 있다.
누가 봐도 변절자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가치관을 지키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옥성호 씨는 과거 [갑각류 크리스천 블랙 편](2013) 서문에서 스님들의 대화를 인용한 적이 있다.
"진리를 위해 불교를 택한 것이지, 불교를 위해 진리를 택한 것이 아니다."p6
스님의 대화를 상기시키면서 옥성호 씨는 불변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최전선으로 갔다.
그는 그의 다짐을 계속해서 지키고 있었다.
그는 옛날에도, 지금도 양심을 따라가고 있다.
비록 양심을 따랐을 때 미궁을 맞이해야 하지만, 기독교 교리라는 편리하고 안락한 온실에 머물지 않았다.
나 또한 그의 발자취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나도 이 길의 끝이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양심을 속이면서까지 신앙이라는 불합리 속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욥기는 그야말로 가장 양심적으로 봐야 할 책이다.
욥처럼 하나님께 대들면서 정직하게 자신의 처지와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과정이야 어쨌든, 결국 욥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다.
욥이 했던 행동은 양심을 따라한 행동이다.
우리에겐 그런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졌을 땐, 예수 안 믿는 모든 사람들이 "눈이 어두워서 안 믿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과연 누가 눈이 어두운지는 이 책을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 욥기는 차라리 판타지 소설 창작물이어야 한다.
차라리 이 욥기는 조작된 판타지 소설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만약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진짜로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신앙해선 안 된다.
우리는 그냥 거대한 힘에 유린당하는 피해자일 뿐이다.
심심해서 개미 몸통을 자르고, 물에 붓기도 하고,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 수준의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한단 말인가?
누구라도 양심이 있다면 그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라고 말할 것이다.
차라리 욥기가 소설이었으면 좋겠다.
고통에 대한 답은 찾지 못하더라도, 인간보다 타락한 그리스 로마 신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을 예배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P.S.: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만한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개역한글)

고통 앞에 “할 만한”이라는 보조 형용사를 붙여 신앙 고백의 기회로 만들라고 강요하는 것만큼 잔인한 종교적 폭력도 없다. P354


욥을 보고서 고전 10:13을 보니 이 구절이 엄청 무서워졌다.
정말 고전 10:13이 진리라면 난 소망한다.
내 능력이 한없이 어리고 약하기를. 그래서 내 주위가 불행하지 않고 모두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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