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모태신앙이 가져야 할 것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다.
질문과 용기다.
모태신앙은 태어날 때부터 당연하게 믿는 것이 있다. 바로 사도신경이다.
마치 요즘 태어난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당연하게 믿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스마트폰 없이도 살았다고 한다면 과연 이 시대 아이들은 어떤 세계였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사도신경은 모태신앙인들에게 있어 그냥 삶의 바탕화면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시라는 교리는 너무도 당연해서 지루할 정도다.
(그만큼 주일학교 교육이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대단하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주일학교를 무시하지 말라.)
그런데 점점 나이를 먹고, 점점 질문이라는 걸 해보면 정말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논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니, 어떻게 사각형이자 삼각형인 도형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하나임과 동시에 셋이 될 수가 있지?
물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믿음”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면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이라는 말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비록 그것이 “비상식적”이라 할지라도 신앙이기 때문에, 신의 영역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바트 어만은 예수님의 하나님 됨이 결코 동화 속에서 일어났던 “기적적인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믿음이 없구만”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가 꺼내든 역사가 내 마음을 요동시킨다.
사복음서에서 믿어왔던 예수님에 대한 모습들이 이렇게도 달랐다는 걸 깨닫게 되고, 처음에 인간이었던 예수님이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으로까지 격상되었는지 정말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런데 바트 어만의 주장은 전혀 비이성적이거나 몰상식하지 않다. 왜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역사적으로 팩트를 근거로 접근하기에 그의 말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이 책 초반에는 그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반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막 이것 저것 열심히 필기를 하면서 반박을 나름대로 했다. 그런데 중반 이후 8장 이후부터는 펜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저 바트 어만의 흐름대로 역사 여행을 하면서 이런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특히, 1세기 이후 2,3 세기에 있었던 기독론의 변천과정은 깔끔했고, 엄청나게 유익한 정보들이었다. 아마 이 책을 소장하고서 자주 살펴볼 부분일 듯싶다.
이제 다음에 읽어야 할 책은 아마도 이 책에 대한 반박문인 [하나님이 어떻게 예수가 되었나]가 될 것이다.
과연 바트 어만의 팩트폭행을 어떻게 맞받아칠지 또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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